제2장 저자로서의 자격과 집필 이유




클릭! 이미지로 바로 읽기!
"양심의 위기" 풀버전





제 2장 저자로서의 자격과 집필 이유

  •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을 힘입어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내 형제들, 곧 육체를 따라 된 내 친족들을 위해서라면”-신세),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 로마서 9:1, 2, 「새번역」
  • [역자주 1) 원문에는 「신 영어 성서」NEB에서 인용했다.]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는 앞 장의 내용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문제는 왜 하필이면 내가 이 책을 써야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나의 배경과 그 배경으로 인해 얻게 된 균형 잡힌 시각 때문입니다. 유아시절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나의 삶은 여호와의 증인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나와 같이 어릴 때부터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동안 내가 얻었던 독특한 경험은 결코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러한 독특한 경험 속에서 내가 알게 된 정보는 절대 다수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정보들은 거의 대부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얻은 것입니다.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 정보들을 얻게 되었고, 그 일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이유는 앞의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나의 양심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도 아무런 정당한 이유 없이 깊은 상처가 쌓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사실이 당사자에게 숨겨지고 있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동료들 앞에서 어떤 의무감을 느껴야 합니까? 바로 이러한 의문들이 내가 고심해왔던 것들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파생되는 부수적인 면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위에서 말한 첫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내 자신의 ‘업적’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 부분 생략할 것입니다. 물론 현 상황에서는 그러한 내용까지 말할 필요가 있긴 합니다. 어떤 면에선 사도 바울이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해야 하는 다음과 같은 상황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억지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에게 칭찬을 받아 마땅합니다. 비록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현대인), 저 ‘가장 위대한 사도들’보다 조금도 뒤질 것이 없습니다. [각주 2)고린도후서 12:11의 한국어 번역은 「쉬운성경」에서, 괄호안은 「현대인의 성경」에서 발췌. 원문은 「신 영어 성서」NEB에서 인용했으며 괄호 안은 「신 국제역」NIV에서 인용했다. 또한 3장1,2절; 5장12,13절; 6장4-10절; 11장21-29절과 비교.]

내가 바울만큼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나의 업적을 다루지 않는 이유와 동기가 바울의 그것과 상응하는 것임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분의 조부모 중 세 분이) 여호와의 증인이셨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1913년에 침례를 받으셨는데, 당시는 증인이 단순히 ‘성경 연구생’이라고 불리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1938년 16살이 되기 전까지 활동적인 증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면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호별 방문 ‘증거’에 매달 20~30시간을 바치고 있었고, 길거리에 서서 사람들에게 잡지를 전하고 전도지를 전했습니다. 길거리 전도를 할 때면, “성서에 의하면, 종교는 올무이다. 하느님과 왕 그리스도를 섬기라”는 플래카드를 앞뒤로 걸치고 있었습니다. [역자주 3) 당시 플래카드에 가장 흔하게 사용된 두 문장은 “종교는 올무이며, 속임수다.” “하느님과 왕 그리스도를 섬기라”였다. 이것은 당시 증인들이 “종교”라는 단어에 대해 현재의 증인들과는 다른 정의를 가졌기 때문이었는데, 1993년에 발행된 「선포자」책 22장 447면에는 이런 설명이 나온다. “당시에 그들은 종교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위배되는 모든 숭배를 가리키는 것 이라고 이해하였다.”]

1938년에 나는 (우리 집에서 오하이오 강을 건너야 하는) 신시내티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대회에서 워치타워 협회장인 판사 조셉. F. 러더퍼드가 영국 런던에서 연설하는 내용을 무선전화를 통해 들었습니다. “사실을 보라”는 제목의 연설 서두에서 러더퍼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어떤 사실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 예민한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일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실의 일부를 감추는 것을 변명하거나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특히 사람들의 복지가 관련되어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사실이 전해질 때, 그들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사실을 직시해야 하며, 그들 자신의 최상의 유익을 위하여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야 합니다. 이전에 가졌던 믿음이나 생각이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고려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각주 4)「사실을 보라」(Face the Facts) 소책자 영문, 3면. (원문에는 사진 복사본)]

그의 연설은 내 인생의 길에서 가치 있는 원칙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나는 이제 러더퍼드가 제시하는 사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해엔 아직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았지만, 나치즘과 파시즘이 세력을 얻어가며 민주주의 나라들에 점점 위협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워치타워 협회장은 몇 가지 주요점들을 강조했는데, 그중 일부는 이렇습니다. :

  • “하느님께서는 열심히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진리를 명확히 볼 수 있게 해주셨으며, 종교가 일종의 숭배 행위이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능력을 부인하게 하는 것이고 하느님에게서 돌아서게 하는 것이며 … 따라서 종교와 그리스도교는 서로 정반대되는 것입니다.[각주 5>「사실을 보라」영문 7,8면. (여호와의 증인들은 현재, “종교”라는 단어를 참 숭배에도 적용시켜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긴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끝났을 때 무슨 일들이 일어난다고 예언하셨습니까? 세계 전쟁, 기근, 질병, 나라들의 고난,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예언하셨지만 무엇보다도 기이한 괴물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의문의 여지없이 실제 일어난 사실들은 사탄의 세상이 끝났다는 것을 증명해주었으며, 이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 [각주 6) 「사실을 보라」(Face the Facts) 영문 9면. (당시의 가르침은, 1914년에 사탄에게 권세를 허락한 기간이 끝났으며 그때 “세상 끝”이 이미 온 것으로 가르쳤다. 지금은 더 이상 협회 출판물에서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독일은 현재 교황과 동맹관계에 있으며 대영제국도 동맹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때 민주주의의 보루였던 미합중국은 전체주의 통치를 확립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지금 이 세상에 사탄의 독재라는 기이한 현상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왕국에 도전하며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제 전체주의 연합이 영국과 미국을 지배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막으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우리의 안전은 주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 [각주 7)「사실을 보라」(Face the Facts) 영문 16,17,27면. (잘 알려진 것처럼, 제 2차 세계대전은 나치와 파시스트라는 “독재적 괴물”이 패배하는 것으로 끝났다. 연설과 소책자에서 예언한 것과는 정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당시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된 내용은 굵은 글씨로 [역자주 8) 원문에서는 “이탤릭체”로 표시했다. 이 책에서는 한글의 특성상 이탤릭체보다는 굵은 글씨(볼드체)로 강조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표시했습니다. 그 연설은 나를 거의 흥분시킬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러한 감정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증인들은 위의 내용 중 어떤 것도 믿지 않습니다.
러더퍼드는 1935년에 “땅을 가득 채우라”는 주제로 또 하나의 중요한 연설을 했습니다. 그 연설은 하느님의 소식에 관한 이전 견해를 발전시킨 내용이었는데, “적은 무리”는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며, 지금 존재하는 “다른 양들”은 땅에서 살게 될 반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아마겟돈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의로운 자손들을 낳고 땅을 가득 채울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음은 이 연설의 일부입니다.

  • “그들은 하느님의 조직 안에서 보호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들은 몰두해야 합니다. 침례를 받아야하며 조직 안에 숨어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서 노아가 건축한 방주는 하느님의 조직을 상징합니다.… 「사실을 보라」(Face the Facts) 영문 40, 41면. (방주의 상징적 중요성에 대한 관점은 계속 변했다. 그러나 진술된 것처럼 조직이 구원의 필수 요소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또한 워치타워 협회장은 노아의 세 아들이 홍수가 끝난 지 2년 동안 분명히 자식을 낳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현재 이 땅에 희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지금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성경적으로 바람직한 일입니까? 성경이 지지하는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 무거운 짐을 지는 일 없이 자유롭게 지내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주께서 명령하신 대로 주의 뜻을 행할 수 있으며, 또한 아마겟돈 때 방해받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을 보라」(Face the Facts) 영문 46,47면. (원문에는 사진 복사본)

조셉 러더퍼드는 특유의 억양으로 힘 있게 연설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냥 사실이 아니라,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으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계획을 세울 때 고려해야 할 확고한 진리였습니다. 증거활동은 적어도 결혼과 출산 등의 개인적인 일들 보다는 우선순위에 있어야 한다는 점과, 또한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각주 11)러더퍼드가 이렇게 말한 1959년 당시 나는 36세였다. 막 결혼하여 아직 아이가 없었던 나와 아내는, 대부분의 결혼 생활 동안에 피임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나는 1939년에 침례를 받았고, 1940년 6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즉시 증거 활동을 위하여 전 시간 봉사에 참여했습니다. [역자주 12) - “증거 활동”(witnessing activity)이란, 전도활동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전 시간 봉사”(full-time service)란, 증인들이 (절대 다수는 무보수로) 자발적으로 전도 활동에 상당한 시간을 바치기로 약속하고 이행하는 활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파이오니아 봉사”역시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 해는 세상이나 여호와의 증인 모두에게 격동의 해였습니다. 그 때는 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었고, 여호와의 증인 활동이 몇몇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으며, 수백 명의 증인들이 투옥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수많은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이 (그들이 숭배의 한 형태로 생각하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였습니다. 증인들의 중립적인 태도는 종종 스스로를 충성스럽고 애국적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적개심을 갖도록 했습니다. 잔인한 폭도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해 1940년 여름, 우리 가족은 미시건 주의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대규모 증인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포위당하고 있다는 팽팽한 긴장감이 만연했습니다. 대회의 마지막에 러더퍼드 판사는 “이 대회가 큰 환난이 닥치기 전에 보는 마지막 대회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해 가을에 나는 여름옷들을 다 버렸는데, 왜냐하면 다시 그 옷들을 입게 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거나 다른 많은 증인들처럼 나치 수용소에 감금될 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폭도들의 공격은 1940년 초반부터 점점 거세졌습니다. 인디애나 주 코너스빌에서는, 단순히 가정에서 열리는 연구 모임에서 워치타워 출판물을 연구했다는 이유로 두 명의 여자 증인들이 선동죄(“폭동 음모”)로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재판은 5일간 진행되었으며, 마지막 날 밤 배심원들은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법원을 나오면서 폭도들은 피고 측 변호인(빅터 슈미트라는 증인)과 그의 아내에게 거친 공격을 퍼부었고, 그 두 부부는 거센 비를 맞으며 도시 밖까지 걸어서 가야만 했습니다.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슈미트의 아내는 도중에 하혈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때 나는 증인의 대표자 한 명(잭 레인보우)과 함께 차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그들의 도시”로 돌아오면 죽여 버리겠다는 위협까지 받았던 사람입니다. 도시 경계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폭도들에게 쫓기고 있던 슈미트 부부를 보았습니다.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차에 태웠습니다. 나보다 먼저 그들을 태우려고 시도한 다른 증인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고 차 유리창만 깨졌습니다. 우리가 슈미트의 아내를 차에 태우자 그녀는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얼굴에 멍이 들었고, 깊은 상처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놋쇠를 낀 주먹(brass knuckles)에 맞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각주 13) 「1975년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영문 186-188면 참조.(한국어는 「1976년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미합중국 편 제3부 165-167면 참조) 위 사진은 내 개인 사진첩에서 찾아서 게재하는 것이다. 당시에 우리는 그를 그의 집에 데려다준 후에, 피 묻은 옷을 갈아입도록 도와주었다. 사진은 그 직후 찍은 빅터 슈미트(Victor Schmidt)의 모습이다.]

가혹하고 무정한 편협함을 직접 경험한 것은 어린 나의 마음에 또렷한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럴수록 하느님의 참된 종들과 함께하는 인생행로는 의롭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 후,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온 내 부모님과 두 명의 누이들과 또 나를 포함한 75명의 증인들은 코너스빌까지 가서 “기습적인” 증거 활동을 시도했습니다. 이것은 워치타워 협회의 법률 자문위원인 헤이든 커빙턴이 추천한 전술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명을 제외하고 남녀, 심지어 아이들까지 모두 체포되어 여러 감옥으로 분산 투옥되었습니다. 우리는 보석으로 풀려나기까지 일주일 동안 감금되었습니다. 아직 십대였던 나는 처음으로 육중한 철장 문이 닫히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를 듣고는 이제 행동의 자유를 빼앗겼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몇 개월 후, 나는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코너스빌 사건을 항소한 대법원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나의 삼촌 프레더릭 프랜즈가 여호와의 증인 전문가의 자격으로 협회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브루클린에서 그곳으로 왔습니다. 삼촌은 1920년부터 워치타워 본부의 성원이었으며, 러더퍼드 판사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그가 오자 그 지방에 있는 회중들은 한 저녁 집회에서 그에게 연설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프랜즈는 수많은 증인들이 갖고 있는 임박한 종말에 대한 태도에 대해 연설했습니다. 나는 삼촌이 정반대의 연설을 하는 것에 대해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삼촌은, 브루클린에서는 끝을 기대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이런 말도 했습니다. “파수대 잡지를 구독하실 분들은 꼭 6개월 치 예약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1년이나 2년 예약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삼촌의 연설 요점은 디트로이트 대회에서 했던 협회장의 말과는 너무도 상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삼촌이 협회로부터 정식으로 승인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삼촌에게 가서, 삼촌의 말이 브루클린에 전해지면 불충실한 사람으로 비쳐질 수도 있고, 그때까지 발전되고 있었던 증인들의 극한 긴급성을 흐트러뜨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40대 후반의 나이였음에도 삼촌은 러더퍼드 판사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였으며, 나는 그의 말을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좀 경솔하고 독립적인 태도로 인한 것이라 여길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해에 나는 집을 떠나, 켄터키 동부와 웨스트버지니아의 탄광지역에 있는 젊은 동료 증인과 봉사 짝이 되었습니다. 그곳은 폭력성 협박이 거의 일상적인 곳이었습니다. 어떤 탄광촌은 목재로 지어진 집들이 고속도로를 따라 길게 줄지어 있었는데, 때로는 그 집들의 끝에 서서 뒤돌아다보면 우리가 방문을 시작한 집에서부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흥분하여 폭도들을 모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켄터키의 “옥타비아 J” 탄광촌에서는 분노한 일단의 광부들이 우리의 낡은 포드 “A형” 자동차를 둘러싸고는 “여기서 꺼져. 켄터키 주에서 꺼져. 목숨이 소중하면 돌아오지 마라.”고 말했습니다. 이성적으로 이야기해 보려는 시도는 더욱 큰 분노를 불러일으킬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몇 개월 후에 그곳에 다시 갔을 때는 우리에게 총을 쏘며 쫓아왔습니다. 우리는 뒷길로 가서 산을 넘어 탈출하여 간신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광부들을 움직였던 힘은 애국적인 열정과 종교적인 광신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자적으로 불타는 지옥의 고통을 부정하는 우리의 믿음은(이 때문에 어린 소년들은 우리가 차를 타고 지나갈 때 “지옥이 없다는 놈들”{no-hellers}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전쟁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동일하게 사람들로부터 반대를 받았습니다.

당시의 편협한 종교적 광신은 나에게 소름끼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편견이 없는 자유로운 조직의 일원이라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내 기대와는 반대로 1941년 여름이 오고, 나는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또 다른 대회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나는 체구가 큰 헤이든 커빙턴과 부 협회장 네이선 노어가 판사 러더퍼드가 탄 큰 차를 경호하면서 대회장으로 들어올 때 많은 사람들이 차로 몰려든 모습을 기억합니다. 대회 마지막 날, 러더퍼드는 5살에서 18살까지의 모든 아이들을 연단 앞 지정된 좌석에 앉게 하고, 준비된 연설을 마친 후에 그들에게 즉흥연설을 했습니다.

보통은 무뚝뚝한 표정과 목소리를 가진 이 키 큰 남자가, 이제 이 아이들에게 인자한 아버지의 어조로 말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다른 고대의 신실한 사람들이 부활해서 그들의 배우자 선택을 도와줄 때까지 그들의 마음속에서 결혼을 지워버리라고 권했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어린이들」(Children) 이라는 새로 나온 책을 한 부씩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책은 존과 유니스라는 가상의 젊은 증인 커플을 등장시켜 결혼에 관한 내용을 풀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혼한 사이였지만 새 질서의 도래가 너무도 가까웠기 때문에 결혼을 미루기로 결정합니다. 그 책에서, 존은 유니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몇 년 내로 우리는 결혼할 수 있을 거야. 주의 은혜로, 주께 영광이 되는 사랑스런 아이들도 가질 것이고 말이야. 이 땅에 영원한 평화가 올 때까지 결혼을 미루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지금은 짐을 가중시켜서는 안 돼. 오히려 자유로운 상태에서 주를 섬길 준비를 해야만 해. 신권통치가 온 땅에 임하게 되면 가정을 꾸리는 것이 짐이 되지 않으니까 말이야.” [각주 14) 1941년에 발행한 「어린이들」Children, 366면.
    (역자추가) 원문에는 해당 출판물을 그대로 찍어서 올렸다. 또한 “몇 년”으로 번역한 “a few years”라는 표현은 보통 영어권에서는 1~2년을 의미하는 시간이 아닌 적어도 3년 이상의 기간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많다. 또한 정해지지 않은 기간을 의미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결코 많은 기간(many years)을 의미할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1926년~40년대에 한국과 일본을 총괄하던 감독자이자 일본계 미국인인 아카시 준소(明石順三)는 협회 서적들을 번역하면서 이 “a few years”를 “두 서너 해”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이 「1988년 연감」 149면(영문, 한국어 동일)에 소개되어 있다. 아울러 「양심의 위기」일본어판은 「어린이들」책의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역시 “1~2년”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표현은 극히 짧은 기간을 연상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

당시 나는 19살이었는데, 러더퍼드의 연설이 내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내적으로 고무된 감정과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이 동시에 묘하게 느껴졌던 것을 80대인 지금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나이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막연한 기간 동안 결혼이란 문제를 제쳐두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그런 식의 말을 듣는 것은 나를 심란하게 했습니다. 가톨릭 사제가 되려고 하는 청소년들이 느끼는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물론 아마겟돈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협회장의 연설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1941년 10월 15일호 「파수대」는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 “「어린이들」책을 선물 받은 아이들은 그것을 꼭 껴안고 행진했다. 아이들에게 그 책은 심심할 때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라, 아마겟돈 전에 남아 있는 몇 달 동안 주께서 주신 가장 효과적인 봉사 도구였다.” [각주 15)「파수대」영문 1941년 9월 15일호 참조. 밑줄은 내가 그은 것이다.]

 
몇 년 후에 나는 당시 판사 러더퍼드가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아내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고 있었는데, 아내 역시 여호와의 증인이며 병환 중에 있었습니다. 그의 외아들은 성인이 되어서는 아버지의 종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의 삼촌인 프레더릭 프랜즈는 러더퍼드의 악화되는 건강 상태가 그 자신의 생전에 “끝”이 오는 것을 보고자 하는 강한 욕망과 어우러져, 1940년과 1941년에 했던 그러한 많은 연설들의 동기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나는 그 책에 나오는 연인이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이었다면, 그들의 약혼 기간은 훨씬 길어졌을 것이며, 사실상 지금까지도 약혼 상태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회에 참석했던 모든 어린 소녀들은 이제는 출산의 나이를 훨씬 넘어서는, 적어도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반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회에 참석했던 어린이들 중 일부는 그들이 들었던 충고를 정말로 따라서, 정상적으로 결혼해야 할 시기를 독신 또는 미혼 상태로 보내 버렸습니다.

1942년, 오하이오 주 웰스턴에서 있었던 “특별 파이오니아” 임명은 나에게 또 다른 경험이 되었습니다. [각주 16) “특별 파이오니아”는 협회가 특별히 임명하는 전 시간 대표자(개척자)이다. 상당한 시간을 바치도록 되어있으며, 매달 지출하는 경비를 충당하도록 소액의 수당도 받는다.] 다른 젊은 증인과 짝이 된 나는 폭이 1.8m에 길이가 4.3m 정도(약 2.4평) 되는 작은 트레일러 집을 직접 만들어서 거기에 살았습니다. 그것은 ‘차 위에 얹어 놓은 상자’에 불과했습니다. 단열도 전혀 되지 않았으며, 우리가 가진 작은 석탄 난로는 기껏해야 몇 시간밖에 타지 않았습니다. 추운 겨울밤에는 트레일러 안에 있던 양동이 물이 꽁꽁 얼어버린 경우도 많았고, 동상 걸린 발이 너무 아파서 밤중에 깨어난 다음에 다시 잠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출판물 기부금으로 받는 돈을 제외하면, 협회로부터 각자 매월 최고 15달러의 수당만 받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생활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각주 17) 수당 신청서에는 인쇄물을 전하고 받은 기부금과 지출내역을 적는 칸과 두 금액의 차액을 적는 칸도 있었다. 이때 그 차액이 15달러보다 작으면, 나는 15달러보다 적은 금액을 청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 보니까 지속적으로 자금이 부족하게 되었고, 나는 반복해서 더 적은 수당을 청구했다. 나중에서야 거의 대부분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그냥 15달러를 그대로 청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도 좀 나은 달에는, 삶은 감자와 동물성 마가린과 하루 지난 빵(원래 가격의 반 값)을 하루 중 한 번은 먹을 수 있었습니다. 내 짝은 오래된 차가 있었지만, 우리가 기름을 넣을 여유가 있었던 날은 드물었습니다.

역시 이 마을에서도 반대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어린 사내아이들이 트레일러의 모든 유리창을 깨버린 경우도 한두 번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엔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이 완전히 옆으로 넘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또다시 체포되어 구치소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경험도 했습니다. 구치소에서는 침대에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바람에 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은 꼬박 누군가 놓고 간 빈 깡통에 앉아서 보냈습니다.

1944년에는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라는 5개월 과정의 선교 학교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졸업 후 선교인 임명을 기다리는 사이, 일 년 반 동안 나는 캘리포니아의 여러 지역들과 애리조나 주에 있는 회중들을 “순회”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했을 때는, 그곳에 있는 “벳사림”(Beth Sarim, “군왕들의 집”이란 뜻)에서 5일을 보냈습니다. 그곳은 협회가 지은 커다란 집인데, 아벨에서 시작되는 고대의 충실한 사람들이 부활할 때 그들이 살게 될 곳으로, 협회에 의해 ‘위탁관리’되고 있었습니다. [각주 18) 1939년에 발행된 「구원」(Salvation)책 영문 311,312면 참조.] 폐질환이 있었던 판사 러더퍼드는 생전에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습니다. 벳사림은 나에게 좀 비현실적인 느낌을 갖게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샌디에이고는 멋진 도시이며 고상한 상류층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지만, 내가 성서에서 읽은 사람들이 왜 그곳에 사는 것에 흥미를 가져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말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각주 19) 벳사림 저택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판매 처분되었다. 아마겟돈 전에 “고대 충성자들”(고대의 충실한 사람들)이 부활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도 폐기되었다.]

내 첫 번째 선교 임명지는 프랑스였는데, 병무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는 바람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이미 “성직자”로 병역 면제를 받았음에도, 병무청에서는 군복무 나이 제한에 걸린다며 출국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역자주 20) 증인들은 영어 단어 “미니스터”(minister)를 보통 “봉사자”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전도하는 사람을 뜻하며 모든 여호와의 증인에게 적용되는 단어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성직자”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가 그런 경우이다. 미국 등 일부나라에서 징병제가 적용되던 시절에 병역 면제 조건에 해당하려면 “성직자” 신분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일부 선교인들 및 베델 성원 그리고 일부 파이오니아 증인들은 “성직자”(minister)로 인정받아 병역을 면제받았다. 한국에서는 그런 제도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또한, 「파수대」1996년 5월 1일호 18-19면 참조.] 그래서 (미국 내의 섬이라고 간주되는) 푸에르토리코 섬으로 임명이 바뀌었습니다. 1946년, 협회장 네이선 노어는(러더퍼드는 1942년 초에 사망) 우리 선교인 그룹을 파견하면서, 우리의 임무는 다른 나라들에서 ‘지부 감독자’가 되어 감독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강조한 것들 중에는, 만일 우리가 선교인으로 일하는 것을 계속하기 원한다면 연애와 결혼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지 피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독신을 포기하는 것은 임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인에 대한 정책이었습니다. [각주 21) 기본적으로 동일한 규칙이 세계 본부와 지부에 적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규칙은 1950년대에 바뀌었다. 노어 자신이 결혼한 것이다.]

푸에르토리코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산후안에 “선교인 숙소”를 마련하고 함께 살게 되었는데, 6개 침실이 있는 2층집에서 한 쌍의 부부와 일곱 명의 미혼 여성들 그리고 내가 함께 살았습니다. 나는 노어의 권고에 따라서 바쁘게 지냈습니다. (때로는 일주일에 15건 이상의 성서연구를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결혼에 관한 정책과 사람들과 밀접하게 생활하는 환경이 부딪치며 생기게 된 압력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나를 짓눌렀습니다. 여러 차례 이질에 감염되었고, 극심한 복통을 동반한 파라티푸스 감염과 혈변 후 전염성 간염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에도 그러한 압력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이질과 파라티푸스에 걸렸을 때도 사무실에서 일했으며, 계단 오를 힘조차 없는 간염에 걸렸을 때 일주일 휴식을 취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8년을 그러한 복합적인 긴장 속에서 살고 나니 신경쇠약 일보직전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협회장에게 편지를 쓰면서 (편지에서 그것을 요청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지부 감독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대신 미국으로 돌아와서 순회활동을 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임무를 계속 수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며, 결국 다른 도시로 임명받게 되었습니다. 임명이 변경된 아구아딜라 시는 나에게 전혀 끌리는 곳이 아니었지만, 그곳에 더 큰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내가 요청했었습니다.

일 년이 좀 안되어서 나는 그 섬의 회중들과 인근에 있는 섬 버진 아일랜드(푸에르토리코 동부에 위치)의 회중들을 순회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도미니카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

다른 특별한 경우를 말하자면, 협회가 정기적으로 나에게 도미니카 공화국을 방문할 것을 지시한 일이 있었습니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그 나라의 최고 실권자 라파엘 트루히요에 의해 공식적으로 금지된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를 방문하는 주된 목적은 협회 출판물을 몰래 유입하는 것이었습니다. [각주 22) 나는 중간키의 체형이었지만, 푸에르토리코에 있던 당시의 체중은 53kg에 불과했다.(19페이지?? 사진 참조) 몸 주위에 잡지 몇 권을 둘러서 그 위에 속옷 두 겹을 입고, 심지어 바지안쪽에 384페이지 두께의 책을 펴서 넣어도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은 비행기에 앉아있는 동안 책 모서리가 허벅지를 찔렀기 때문에 좀 힘들었다는 것뿐이다.] 나는 그 임무를 여러 번 수행했습니다. 1955년이 되자 협회는 나에게, 트루히요에게 개인적으로 탄원서를 전달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트루히요의 반감을 산 사람들은 조용히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매우 두려운 마음으로 그 임무를 받아들였습니다.

시우다드트루히요(지금은 산토도밍고)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도미니카 대원수에게 “북미의 교육자로 귀하와 귀국에 매우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도미니카 최고 실권자인 라파엘 트루히요를 단독으로 만나기 원한다는 전보를 쳤습니다. 트루히요와의 만남이 국가 궁전에서 이루어졌으며, 나는 그에게 탄원서를 건네줄 수 있었습니다. [각주 23) 트루히요 대원수는 훈장이 줄줄이 걸린 정복을 입고 나를 맞아주었다.(전부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스스로 수여한 훈장) 나의 실제 임무가 무엇인지를 알고 나서는 면담은 아주 짧게 끝났다. 그러나 얼마 후 금지령이 일 년 정도 풀렸다가 다시 발효된 사실에 비추어 그 때의 인상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놀랍게도 나는 추방되지 않았으며, 정기적인 출판물 “밀수” 여행을 체포되는 일 없이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57년에 폭력적인 박해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모든 미국인 여호와의 증인 선교인들은 국외로 추방되었으며, 많은 그 지역 증인들은 잔인하게 구타당하고 투옥되었습니다. 박해의 주요 이유는 군사훈련법이 요구하는 “행군”을 남자 증인들이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상당한 종교적인 반대도 있었습니다. 성직자들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신문을 통해 선동적인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협회는 나에게 도미니카로 가서 그곳 증인들의 상태를 점검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미 얼마 전에 나는 그곳 선교인들에게 협회의 지시 사항을 전달했고, 그곳의 잔혹한 박해에 대한 실상을 자세히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들은 푸에르토리코 신문들에 의해 크게 다루어졌습니다. 나는 트루히요의 측근으로부터 그가 이 불편한 보도에 대해 크게 화를 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타깃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시우다드 트루히요의 한 호텔, 침대 옆에 프랑스식 창문이 달린 1층 방에서 첫날밤을 보낸 기억이 납니다. [역자주 24) 프랑스식 창문-프랑스의 문과 비슷하게 여러 개의 격자로 나눈 칸에 작은 유리를 격자마다 끼워서 만든 창문. 보통은 여닫이 창문이 많다.] 온몸으로 위험을 느끼던 나는 침대에다가 사람이 자는 것처럼 위장 해 놓고, 침대 뒤쪽 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별문제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으며, 다음 여러 해 동안에도 계속해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결혼에 관한 협회의 정책이 변경되었습니다. 푸에르토리코에 온지 13년이 지나 이제 37살이 되어가는 나이에 나는 신시아(Cynthia)와 결혼했고, 우리는 함께 순회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그 나라의 경제상황은 오늘날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열악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섬기던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작은 집에서 살았는데, 어떤 집은 물과 전기가 들어오고 어떤 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사생활이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생활이란 게 거의 없었던 경우도 많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젊었던 우리는 그럭저럭 환경에 적응해 나갔지만, 그로 인해 아내의 건강은 심각하게 위협을 받았습니다.

결혼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토르톨라라는 작은 섬에서 봉사하던 중 아내가 심각한 위염에 걸렸습니다. 분명히 오염된 물과 상한 음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던 집의 주인은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둔 고상한 서인도제도 부부였는데, 불행하게도 그들이 우리에게 세를 내 준 집은 아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바퀴벌레가 득실거렸습니다. 밤마다 모기장을 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에 바퀴벌레가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았습니다. 하루는 한쪽 구석에 놓아둔 커다란 옷상자가 바퀴벌레의 소굴 같아 보여, 살충제를 들고 상자로 가서 맨 위 옷가지를 들어보았습니다. 나는 재빨리 옷을 내려놓았는데, 수백 마리는 돼 보이는 작은 바퀴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살충제를 뿌리면 온 사방으로 바퀴벌레들이 흩어질까 봐 뿌리지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매일 밤 우리 방과, 하나뿐인 화장실 옆에 있는 부엌으로 커다란 쥐가 들락거렸습니다. 그 쥐는 선반에 놓여있는 통조림을 옮겨갈 정도로 큰 쥐였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결국 아내는 위염이 악화되어 극심한 설사와 주기적인 구토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섬에서 한 명뿐인 의사에게 아내를 데려가 주사를 맞혔으며, 아내의 구토는 일시적으로 멈추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계속되는 설사를 동반하는 구토가 다시 시작되었고, 급기야는 탈수증으로 이어졌습니다. 한밤중에 나는 1마일(약 1.6km)을 달려가서 그 의사를 다시 깨워 집으로 데려온 후에, 아내를 그의 지프차에 태우고 진찰실로 갔습니다. 간호사들이 링거주사를 놓기 위해 아내의 혈관을 찾는데 많은 애를 먹었습니다. 며칠 후에 아내는 퇴원했지만 건강은 결코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후에 기생충(편충) 감염까지 걸려 문제가 더 커졌습니다.

나는 1961년까지 순회활동을 계속하다가, 푸에르토리코에서 인접한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임명지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최고 실권자였던 트루히요는 우리가 그 나라에 도착하기 얼마 전에 암살당했습니다.

그곳에서 거의 5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정권이 바뀌는 것을 4번이나 보았습니다. 1965년 4월에는 우리가 살던 수도를 중심으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과 다른 외국인들이 그 나라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우리 선교인 그룹은 도미니카의 여호와의 증인들과 우리의 임무를 버리고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전시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밤마다 수백발의 소총 소리, 두두두 울리는 기관총 소리와 바주카포와 다른 중무기들의 폭발 소리가 도시를 가득 채웠습니다. 낮에도 때로는 갑작스런 총격전 때문에 바닥에 바싹 엎드려 있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래도 소강상태가 되면 밖으로 나가 조금이라도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난 벌이 날아가는 것 같은 윙윙거리는 총알 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면 총알이 얼마나 머리에 가까이 지나가야 할까요? 이에 대해 한 병사는 태연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총에 맞으면 그 소리가 안 들릴 테니까요.”

그 이후 나머지 15년 동안의 전임 봉사 활동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뉴욕 브루클린 본부에서 일했습니다. 1965년까지 활동했던 초창기의 일들을 이렇게 상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그때까지의 봉사가 사도 바울의 봉사와 비슷한 것으로(질적으로는 비교가 안 되지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드리는 자신의 봉사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오히려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답게 행동했습니다. 우리는 매번 환난과 역경과 어려움을 견뎌 냈습니다.” [각주 25) 고린도 후서 6:4-10. 원문은 「예루살렘성서」JB에서 인용했지만, 한국어는 「쉬운성경」에서 인용하였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연설 내용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연설을 들었는지에 대해서도, 또 많은 신도들을 세워주는 조직적인 업적을 이루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다른 여호와의 증인 선교인들이나 다른 종교의 선교인들보다 낫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 경험에 대해 쓰는 것은, 독자들이 내 경험의 상대적인 가치를 가늠하고 특히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다루어지는 정보들의 타당성과 정직성을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집필하게 된 상황들과 의의

  •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행전4:20 [각주 26) 원문은 「개역표준역」RSV에서 인용했지만, 한국어는 「새번역」에서 인용하였다.]

그 후 15년간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독자들의 반응이 나와 동일할지는 알 수가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아무도 내가 경험한 바를 알지 못하고서는 내가 왜 양심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음과 같은 잠언의 말씀이 매우 적절할 것입니다: “사실을 듣기도 전에 문제에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잠언 18:13.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일 년 전, 뎅기열에 걸려 신경종말이 과민상태가 되었을 때, 나는 10개월 과정의 길르앗 성서 학교를 수료했었습니다. [각주 28) 뎅기열은 모기를 매개로 전염된다는 점에서 말라리아와 비슷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낫는 병이다. 나에게 아직도 그 영향이 남아 있는 것은 어린 시절에 걸린 성홍열 때문인지도 모른다.] 학교 졸업 때, 협회장 N. H. 노어는 나에게 카리브 해 선교봉사를 그만 두고 아내와 함께 브루클린 국제 본부(베델)로 와서 집필부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은 영예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그곳을 떠나는 데에 전혀 흥미가 없었습니다. 나는 브라더 노어와 그의 사무실에서 얘기하면서, 내가 현재의 임명을 얼마나 즐기는지, 그곳 사람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일을 얼마나 즐기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안된 기회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비춰졌음이 분명했습니다. 노어가 매우 불쾌한 심정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단순히 그 일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한 나의 느낌을 알아주기 원한다고만 말하고, 제안된 그 임명을 받아들였습니다.

본부에 도착한지 몇 개월이 지나고 집필부 일을 얼마간 한 후에, 협회장 노어는 나를 자료더미들이 높이 쌓여있는 탁자가 있는 한 사무실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나에게 성서 사전 개발을 담당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 자료들은 전 세계 250명의 남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진 임명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임명들은 주로 그 사람의 조직에서의 위치(지부 사무실 임원, 공장 감독자 등)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부분이 집필 경험이 없었고 거의 대다수가 조사를 할 만한 도서자료나 시간 또는 경험이 없었습니다. 제출된 자료 중 줄잡아 최소 90%정도가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단어들을 “Aaron”(아론)부터 시작하여 “Aaronites”(아론사람들), “Ab”(아브월), “Abaddon”(아바돈) 등의 순으로 정리하며 일을 진행해 나갔지만, 곧 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워치타워 협회의 감독자인 라이먼 스윙글이 합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르앗 성서학교의 사무관인 에드워드 던랩이 합류했습니다. 마침내 봉사부와 집필부의 라인하드 랭타트와 존 위스척이 각각 그 프로젝트 그룹에 합류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진행 과정 중에 간헐적으로 도움을 주었지만, 앞서 언급한 다섯 사람이 5년 후에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라고 불리는 1,696페이지에 달하는 성서사전이 완성될 때까지 일했습니다. [각주 29) 각각의 주제는 집필부 감독자 칼 애덤스가 배정했다. 1988년에는 이 「보조서」에 약간의 수정을 가해서 두 권을 한질로 구성한 「성경 통찰」책이 나왔다. (한국어는 2003년 발행)]

일이 시작될 쯤에, 협회장 노어는 그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있어 핵심 요소가 되어버린 말을 했습니다. 그의 말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뜻으로 이해되었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우연한 행운이 되어 버렸습니다. 당시 그는 우리에게 말을 하면서,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바를 전달하기만을 원합니다. 협회 출판물을 모두 조사해 볼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그가 직접 말해줘서 알았지만, 그가 원했던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프로젝트가 빨리 끝나 비교적 작은 “안내서” 정도의 책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주제와 관련된 특정 성구들에 추가적인 해설을 거의 덧붙이지 않고 단순히 인용하기만 한다면, 최소한의 시간 안에 작업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말을 오해하여, 워치타워 출판물에 나오는 내용에 구속될 필요 없이 성서가 실제로 말하고 있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항상 애써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았을 경우 완성될 내용보다 상당히 다른 종류의 출판물이 완성되었습니다. 250명이 보내준 자료들은 워치타워 출판물에서 “승인된 견해”와 거의 일치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사한 것들은 자주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부 협회장인 프레더릭 프랜즈는 조직 내에서 탁월한 성서학자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사무실로 성서 말씀의 의미를 질문하러 가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자주 나에게 성서주석서를 살펴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담 클라크나 쿡이 뭐라고 말하는지 살펴봐라.”라든가, 히브리 성경과 관련된 주제인 경우에는 “손치노의 주석서를 살펴보지 그래.”라고 말했습니다.

베델 도서실에는 선반마다 그러한 주석서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타 종교 학자들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나를 비롯하여 프로젝트 그룹의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비중을 두지 않았으며 그것을 사용하기를 꺼려했고, 심지어 그 내용을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집필부의 고참 칼 클라인은 때때로 매우 기탄없이 그러한 주석서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큰 바빌론의 젖을 빠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협회가 계시록의 큰 음녀 바빌론을 거짓종교 세계제국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각주 30) 그가 정말 심각한 뜻으로 말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는 프레더릭 프랜즈가 주석서들을 상당히 자주 이용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자기 자신도 역시 그동안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주석서들을 살펴볼수록 대다수의 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성경이 영감 받은 말씀이란 굳건한 믿음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더욱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어떤 주석서들은 18세기 초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우 가치 있고 정확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종종 수년 내에 ‘구식이 되어버리고’ 출판이 중지되어 버리는 우리의 출판물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 주석서들이 오류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석서의 훌륭한 면들은 때때로 발견되는 잘못을 상쇄하고도 남아 보였습니다.

나는 성경의 어느 부분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문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잘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보조서」작업을 정기적으로 함께했던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인식을 가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성서에 나오는 용어를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견해를 단순히 옮기거나 영어 사전에 나오는 정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스스로가 정의하게 놔 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베델 도서실에 있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사전을 사용하였으며 영어 번역에 기초한 색인보다 원어에 기초한 색인들을 더욱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교육적이었고 우리를 매우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의 성서에 대한 이해가 한참 모자란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이 뛰어난 성서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서를 서너 번 통독하였지만 지난 25년의 세월동안 개인적으로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 25년간은 그렇게 진지하고 자세한 성서 연구를 할 수가 없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그러한 연구를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인해 한 번도 그러한 연구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내가 수료한 두 번의 길르앗 성서학교 과정도 너무나 빡빡하게 일정이 짜여 있어서, 묵상을 할 만한 시간이 없었고 여유 있는 조사와 분석을 할 시간도 거의 없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확보된 것과, 그밖에도 성서 보조서들, 용어 사전들, 주석서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색인 등을 동시에 갖게 된 것은 참으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차이를 만든 것은, 항상 문맥을 따르면서 성경 구절의 의미를 결정하게 할 필요성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견해가 바뀌지는 않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가능하다면 하느님의 말씀 자체가 전체 의미를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차츰 깊이 깨달았습니다. 나는 베델 도서실에 있는 100년 혹은 200년이나 된 성서 주석서들이 세월을 넘어서는 상당한 가치를 지니게 된 이유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절과 구절을 통한 그들의 접근 방식이 다소간 성서 문맥상의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였고, 그 때문에 분파적인 견해를 취하거나 상상에 의한 성구 해석을 하지 않도록 그들을 엄격히 통제했던 것입니다.

집필부 감독자 칼 애덤스가 나에게 할당한 주제 중 “연로자(장로)”와 “감독자”란 항목이 있었습니다. 내가 할당받은 것은 단지 항목의 이름뿐이었습니다. 주제를 발전시키는데 따르는 부가적인 지시사항이나 권고사항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워치타워 협회가 1993년에 발행한 조직의 역사를 다룬 책인 「여호와의 증인 - 하나님의 왕국 선포자」책 233면에서 그 점에 관해 설명하는 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위의 설명은 너무나 왜곡되어 있어서 그릇된 인상을 심어줍니다. 위 내용에 따르면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를 위한 조사가 “통치체의 감독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성경에 고착하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진 통치체의 원활한 감독에 의해 보조서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워치타워 협회장 네이선 노어를 제외하곤, 보조서 집필의 시작과 감독이 당시 통치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노어가 그 프로젝트를 시작하긴 했지만 극히 제한적인 부분 말고는 실제적인 감독은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실제 감독은 집필부 감독자인 칼 애덤스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노어는 「보조서」에 포함되는 주제 목록을 개발하지도, 그 주제를 임명하거나 개발하는 것을 감독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주제는 칼 애덤스에 의해 임명되고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애덤스는 통치체 성원이 아니었고, 사실상 “기름부음 받은 자”로 불리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실제 보조서 조사와 집필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한 사람들 중에는 라이먼 스윙글만이 협회 이사진이었고, 그만이 “통치체 성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칼 애덤스로부터 임명을 받았고 그의 감독 하에서 일했습니다.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던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라이먼이 쓴 내용은 칼이 편집하고 승인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네이선 노어와 프레드 프랜즈도 결국 완성된 내용의 일부를 읽기는 했지만, 노어는 칼 애덤스에게 노어 자신이 읽어보아야 된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고르도록 하였고, 그러한 경우조차 거의 드물었습니다.


칼 애덤스(Karl Adams)

앞서 언급했듯이, “연로자(장로)”와 “감독자”란 주제가 나에게 할당되었을 때, 내가 할당받은 것은 그 단어들뿐이었으며,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통치체 성원이 아니었으며, 그 주제에 관한 연구 결과는 통치체에 의한 것도, 심지어 칼 애덤스에 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의 삼촌인 프레더릭 프랜즈가 언질을 주긴 했지만, 항상 내가 먼저 요청한 경우에만 그렇게 했고, 그 이후의 삼촌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함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나의 연구 조사 결과는 네이선 노어와 프레더릭 프랜즈에게 예상 밖의 것이었고, 심지어 아주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비쳐졌음이 분명해졌습니다.

나의 조사는 성서 시대의 장로들과 회중 감독에 대한 제도가 여호와의 증인이 취하고 있는 입장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다소 ‘군주제’적인 제도가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각각의 회중은 “회중의 종” 또는 “회중 감독자”라고 불리는 한 개인의 감독 하에 있었습니다. “감독자”라는 말은 오직 그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의 보조자로 생각되었습니다. 성경적인 장로회 제도는 1932년에 판사 러더퍼드에 의해 끝이 났는데, 이는 일부 장로들이 협회의 프로그램과 정책에 협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각주 31) 이런 조치가 내려진 이유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일부 장로들이 당시에 강력히 권고하던 호별방문 증거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장로들은 집회를 주재하고 연설하는 것에만 열심을 보였다. 바로 워치타워 협회장인 판사 러더퍼드가 정확히 이런 사람이었지만, 이것은 결코 지적된 적이 없었다. 주어진 설명은, 러더퍼드 협회장은 그 책임 때문에 호별방문 활동에 참여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협회장이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러더퍼드는 장로회 제도를 끝내고, 모든 회중들로 하여금 장로회를 폐지하는 대신에 협회가 임명한 “봉사 감독자”를 채택하는 투표를 하게 했습니다. 이 때문에 1950년대에 출판된 신세계역 성서에는 “장로들”(elders)이라는 말 대신에 “연로자들”(older men)이라는 말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공식적으로 용인되었던 말이 아닙니다. [각주 32) 「신세계역」성경의 나중 판에서는 “장로”(elder)가 나오긴 했지만, 단지 계시록에서 하느님의 왕좌(보좌) 주변에 있는 24장로들을 언급할 때뿐이었다.]

조사 결과에 좀 혼란스러워진 나는 증거를 가지고 삼촌에게 갔습니다. 삼촌의 반응은 더 놀라웠습니다. 그는 “오늘날 조직에서 보이는 것을 가지고 성서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거라.”고 말하면서 “보조서를 순수하게 유지하도록 해라.”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항상 조직을 진리를 전하는데 있어 유일한 하느님의 통로로 바라보고 있었던 나에게 삼촌의 말은, 아주 좋게 말해서 독특하게 들렸습니다. 협회에서 출간한 신세계역 사도행전 14:23에 장로들의 임명과 연관되어, “직무에”(to office)라는 원문에 없는 말이 삽입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로 인해 구절의 의미가 좀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자, 삼촌은 “그러면 치우치지 않고 제대로 번역된 다른 번역판들을 살펴 보거라.”고 말했습니다. [각주 33) 「신세계역」성경의 나중 판에서는 이 첨가된 단어들이 삭제되었다. 초판에는 해당 성구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Moreover, they appointed older men to office for them in the congregation and, offering prayer with fastings, they committed them to Jehovah in whom they had become believers.” “또한 그들을 위하여 회중에 연로자들을 직무에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를 드리고, 그들이 믿게 된 여호와께 그들을 맡겼다.”] 삼촌의 사무실을 나오면서 나는 정말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나중에 나는 이 일을 통치체 회기 중에 한 번 이상 삼촌에게 말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그 대화는 성경에 대한 나의 견해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는 삼촌이 성경 진리에 대해 확고한 신뢰를 보여준 것을 무척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최종 결과가 나왔을 때 삼촌이 보인 반응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연로자”와 “감독자”에 관한 작업을 끝낸 후에, 나는 조사 결과를 집필부에 제출했습니다. 보통이라면 협회장 네이선 노어와 부 협회장 프레드 프랜즈는 그 내용을 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필부 책임자인 칼 애덤스가 내가 제출한 기사를 읽고는 노어 형제에게 가서 “이것을 좀 검토해 보셔야겠습니다. 변경된 것이 많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 하나님의 왕국 선포자」책의 설명을 보겠습니다. “폭발적인 증가에 대비함”이라는 소제목하의 둘째 항 내용은, 「보조서」책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내가 제출한 기사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선포자」책에서는 장로들의 “공적 지위”라는 개념이 강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선포자 책의 저자 혹은 저자들이 보조서의 그 기사들을 누가 썼는지 밝힐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항과 이어지는 항의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협회가 성서에서 지적하는 제도에 순응하기 위해 기꺼이 그리고 즉시 필요한 결정을 했다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협회가 그렇게 했습니까?

칼 애덤스가 말한 바에 의하면, 그 기사를 읽은 노어가 프레더릭 프랜즈의 사무실로 가서 상당히 흥분한 채로, “이게 무슨 말인가? 이 늦은 때에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인가?”라고 말하자, 프레더릭 프랜즈는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 그럴 필요도 없고, 지금의 구조를 유지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칼 애덤스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특히 이전에 삼촌이 나에게 한 말을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랬습니다. 나는 삼촌에게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삼촌의 말은 새로운 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보조서」가 여름 지역대회에서 완성본으로 형제들에게 배부될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1세기 회중 모임에서는 모든 장로들이 감독자로 봉사하던 장로회가 존재했었다는 증거를 형제들이 읽게 된다면, 그리고 협회가 성서의 본을 따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느냐고 삼촌에게 물었습니다.

하지만 삼촌은 차분하게, 문제가 될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면서, 현재의 제도가 보조서의 내용을 ‘적용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성서의 선례를 따르지 않는 것은 형제들을 매우 동요시킬지도 모른다는 깊은 염려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삼촌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수십 년 전에 형제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 즉 1914년에 그리스도께서 왕권을 잡으시면 지상의 일을 다스리는 면에서 즉시 변화가 있을지 모른다고 추리했던 것에 관해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의 일들을 한 종을 사용하거나 그 종의 직무를 통해 감독하고 다스리시는데 그것은 새 질서가 도래할 때까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그는 이것을 이전에도 믿었고 지금도 여전히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의 취지는 이전에 했던 말의 취지와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서로 조화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부 협회장은 회중 감독 제도를 변경시킬 것이라는 암시가 담긴 몇몇 대회용 골자를 준비했습니다. 이 골자가 칼 애덤스에게 전해지자, 그는 골자의 내용을 눈치 채고 즉시 협회장 노어에게 가서 “프랜즈 형제를 만나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형제가 마음을 바꾼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칼의 말에 따라, 노어 형제는 프랜즈 형제가 마음을 바꾼 것을 확인했습니다. 단 한 사람이 마음을 바꾼 결과로, 40년간 이어져 오던 협회의 제도에 변화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개선된 변화를 설명하면서, 「여호와의 증인 - 하나님의 왕국 선포자」책에서는 “통치체”의 감독으로 “주의 깊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성경에 보존된 본을 더욱 온전히 따를 수” 있었으며, “계속 하나님의 인도에 따르기로 결심”하면서, “조직이 성서에서 알려 주는 그러한 형태를 더 밀접히 따르기 위한 마련”을 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 사실을 그대로 전달한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놓은 것입니다. 「보조서」를 집필한 사람 혹은 집필진이 당시 경위에 대해 사실 관계를 몰랐거나 아니면 한 명이 아닌 전체 그룹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허위 내용을 적은 것입니다. 밝혀진 사실은 극소수 사람들에게만 실권이 집중되었으며, 한 사람(프레더릭 프랜즈)의 좀 변덕스러운 결정이 세계적인 조직이 가야 할 방향을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연대”(Chronology)라는 주제를 맡게 되었을 때도 그와 비슷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각주 34) 나는 연대 외에도 역사 분야 대부분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메디아-페르시아 및 기타 나라들의 역사와 통치자들에 대해서도 집필을 맡았다.(바빌론의 경우에는 통치자들만) (역자-나라이름은 「신세계역」에서 사용하는 명칭이며, 학교 교과서에서 사용하는 명칭과 일치한다. 증인들이 90년대 초반까지 사용하던 「개역 한글판」성경 표현은 애굽, 앗수르, 바벨론, 메대-바사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는 누가복음 21장 24절에 나오는 “이방인의 때”가 성서 예언에 의하면 1914년에 끝났다는 것입니다. 다니엘 4장에 나오는 “일곱 때” 기간은 1914년을 계산할 수 있는 기초가 되며, 또 다른 성구들을 사용하여 “일곱 때”는 기원전 607년에 시작해서 기원 1914년에 끝나는 2,520년 기간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기간의 시작인 기원전 607년은 바빌론의 정복자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해로 이해합니다. [역자주 35) 대부분의 우리말 성경에는 “느부갓네살”로 나오지만, 학교 교과서와 일반 역사책 그리고 가톨릭 성경에서는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로 나오기 때문에 두 가지 명칭을 동시에 표기하였다.(영어권에서는 역사자료와 성경의 표기법이 동일하다.) ] 나는 기원전 607년이 우리 출판물에서만 나오는 특이한 숫자인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실제 이유는 몰랐습니다.

나는 수개월동안 “연대”에 관한 한 가지 주제만을 조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보조서」에서 가장 긴 내용의 항목을 쓰게 되었습니다. [각주 36) “연대” 항목은 27페이지 분량이었다.(322-348면) 「보조서」의 1988년 개정판인 「성경통찰」책에서는 “연대” 항목을 20페이지로 축소시켰고, 이것이 개정판의 가장 큰 변화였다. 개정판에서는 기원전 607년의 문제점을 인정하는 부분이 삭제되었다.] 1914년 계산에 매우 중요한 기원전 607년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증거들을 찾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하였습니다. 본부 직원으로 당시 내 비서 역할을 하던 찰스 플로거(Charles Ploeger)는 뉴욕의 모든 도서관을 뒤져 기원전 607년을 지지하는 증거를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원전 607년을 지지하는 증거를 단 하나도 찾지 못했고, 오히려 모든 역사가들은 그보다 20년 후를 지적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보조서」에 들어갈 “고고학” 항목을 준비하기 전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된 고대 바빌로니아(바빌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점토를 불에 구워서 만든 설형문자(쐐기문자)판이 그렇게 많은지 알지 못했습니다. (역자) 원문에서는 보통 “수천수만”으로 번역하기도 하는 “tens of thousands”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말을 “수천”으로 번역하면 1만개 이내 “수만”으로 번역하면 10만개 이내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어서 한국어로는 정확하게 범위를 나타낼 수가 없었다. 현재까지 출토된 설형문자(쐐기문자) 점토판은 100만 점에서 200만 점 정도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해마다 2만 점 이상이 새로 출토되는 경우가 많아서 지금도 숫자를 확정할 수 없다. 전 세계 학자들은 엄청난 양 때문에 극히 일부만 판독한 상태이다.
관련된 점토판들을 확인해보니 신 바빌로니아(신 바빌론) 제국에서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가 통치한 기간은 우리가 주장한 기원전 607년과는 맞지가 않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역자주 38) “신 바빌로니아” 제국은 기원전 7세기에 등장한 제국이다. 이 제국은 고대 니므롯이 시날 땅에 건설한 바벨과는 다른 것이며, 기원전 2000년경에 등장한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과도 구별되는 왕국이다. 사르곤 왕과 함무라비 등은 신 바빌론이 아니라 고대 바빌론에 속한다. “신 바빌로니아” 제국은 느부갓네살의 아버지 칼데아(갈대아)사람 나보폴라살이 새롭게 건설한 제국이기 때문에 “칼데아 제국”이라고도 불린다. 성경에서는 후대에 구별하기 위해 만든 명칭인 “고대 바빌로니아”와 “신 바빌로니아”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고, 수도 이름에서 유래한 나라이름 “바빌론”(바벨론)으로 나온다.] 모든 증거는 우리 출판물에서 주장했던 연대기보다 20년씩 이후의 연대를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것들을 보고서 마음이 불안하긴 했지만, 이 모든 반대 증거에도 불구하고 협회의 연대기가 옳다고 믿고 싶었으며, 그런 증거들은 어딘가 잘못됐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따라서 「보조서」책에 쓸 내용을 준비할 때는, 우리의 기원전 607년을 틀린 것으로 만들고 그 연도를 사용해서 계산한 1914년도 틀리게 만들어서 다른 결론을 내리게 만드는, 고고학적인 증거와 역사적 증거들의 신뢰성을 약화시키려고 많은 시간을 노력 했고 많은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찰스 플로거와 나는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 시에 있는 브라운 대학을 찾아가서 특별히 천문학적으로 방대한 자료를 갖고 있는 고대 설형문자 전문가 에이브러햄 작스(Abraham Sachs) 교수를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우리는 방대한 전문 자료들 속에서 오류나 약점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라도 찾고 싶었습니다. 결국 우리의 연대기가 맞으려면, 점토판을 만들었던 수많은 고대 필사자들이 함께 모여서―그럴만한 동기가 전혀 없었지만―음모를 꾸몄다고 가정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나는 마치 법정에서 고대의 증인들이 나타나 신 바빌로니아 제국과 관련된 역사기록의 증거들을 내놓았을 때 그것을 목격한 변호사처럼, 그런 결정적 증거들을 어떻게든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약점이 있는 자료처럼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각주 39)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영문 326-328면과 330, 331면 참조.] 내가 제시한 논증 자체는 정직한 자료를 사용한 것이었지만, 그 의도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연대를 지지하기 위한 동기였다는 점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한 성서 원칙들에 대해서 더 깊은 인식을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협회 가르침에 충실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보조서」책에 여전히 많이 포함시켰습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는데, 「보조서」에 반영된 것들은 우리가 받은 영향에 비하면 작은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책은 많은 증인들 사이에서 성경에 대한 흥미를 자극하도록 도운 것도 사실입니다. 아마도 책의 논조, 접근 방식, 독단적인 자세를 피하려는 집필자들의 노력, 특정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점, 증거를 정직하게 검토하고 그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이런 것들이 아마 우리가 얻었던 가장 중요한 유익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때때로 선입견에 얽매이거나 성경 자체에 고착하는데 실패한 적도 있기 때문에 여전히 부족함을 드러낸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내가 집필한 내용 중에서는 “나라들의 지정된 때”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및 “큰 무리”와 같은 주제가 있는데, 나 자신도 워치타워 출판물에서 가르치는 방향과 일치된 주장들을 포함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간단한데, 당시 내 마음속에는 그러한 협회의 가르침이 “사실”과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나중에 내가 작성한 「보조서」 “머리말”에 나오는 내용을 배신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 책 6면에서는 “이 책의 목적”이라는 제목아래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는 교리적인 주석이나 해석을 만들 의도가 없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또한 비유적인 표현이나 상징적 표현을 다룰 때는 “독단적으로 적용하거나 교리에 맞추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도 나옵니다. 전체적으로는 그 말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깊이 뿌리박힌 믿음이 때때로 그러한 표준에 고착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무산시켰습니다.

「보조서」가 출간된 해에 나는 약 230개국의 여호와의 증인 활동을 감독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 성원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그때까지는 7명으로 구성된 협회 이사회를 통치체와 동일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 이사회는 찰스 테이즈 러셀이 펜실베이니아에서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라고 불리는 법인체를 만들던 처음부터 7명으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71년 10월 20일에, 다른 세 명과 함께 내가 그 확장된 통치체의 성원으로 임명된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임명은 내가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진짜 현실과 대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 이름이 비중 있게 등장한 「타임」지(1982년 2월 22일) 기사 내용을 읽고 화를 낸 증인들도 많았습니다. 그 기사에서는 여호와의 증인 조직을 “비밀” 조직으로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도시와 마을 그리고 시골에서 공개적으로 호별방문 활동을 하도록 격려하는 조직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은 심하게 왜곡된 기사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타임」지 기자들은 이 책 제 1장에서 다룬 사건에 대해서 워치타워 세계본부에 문의를 했을 때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분명히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그대로 썼을 것입니다.

실제로 여호와의 증인 가운데서도 조직의 중심부가 어떻게 그 기능을 발휘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교리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전 세계 증인들의 활동을 감독하는 통치체가 의사결정을 하는 방법과, 내려진 결정들이 항상 만장일치가 된 것인지 또는 만일 의견차이가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결정하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통치체는 비공개로 회의를 진행하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것은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내가 통치체 성원으로 있던 9년 동안 통치체 성원이 아닌 다른 사람이 통치체 정기회기에 참석하도록 허용된 경우는 겨우 두세 번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게다가 그 경우에도 그 사람들은 단지 통치체가 보고서를 가져오라고 요청할 때뿐이었고, 그들이 나가고 나서야 보고된 내용에 대한 토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보고할 내용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그들은 회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통치체는 전체 증인들에게 협회의 수입, 지출, 자산, 투자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전혀 밝히지 않습니다. (매년 연감에 간단한 지출 보고만이 있을 뿐입니다.) [각주 40) 1978년에 통치체에 들어온 재무보고서에는 3억3천2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자산(부동산, 예금 등)이 적혀있었다. 심지어 통치체 성원들 중에서도 협회의 재정적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분명히 현재의 자산은 이 금액을 훨씬 초과할 것이다.]

따라서 많은 종교 단체에서는 일반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지만, 대다수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알 수 없으며 혹시 알더라도 막연하게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통치체를 구성하는 소수의 남자들이 내린 결정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삶에 매우 깊은 영향을 줄 수 있고, 또 실제로 주게 됩니다. 전 세계적으로 모든 증인들은 그들의 결정을 따르게 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내가 이 책을 집필한 결정적인 이유이며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것에 비하면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이유는 사소한 것입니다.




책 임 감

  •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 마태 7:12 (새번역) [각주 41) 원문은 「개역 표준역」RSV에서 인용.]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 원칙에 매여 있을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완벽하게 실천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나 또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들은 이 원칙을 따르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각주 42) 로마서 1:14.] 그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감을 가졌으며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내가 내릴 매우 중대한 결정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다면, 나는 그가 (나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그 정보를 알려주어서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해 주길 바랄 것입니다. 만일 그가 나의 친구라면, 진정한 친구라면, 그는 분명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

9년간의 통치체 생활은 나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무엇보다 나의 양심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내 자신이 인생의 큰 위기에 봉착했음을 알았고, 내가 맞닥뜨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린 결정은 온전히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으며, 그 결과로 치러야 했던 대가는 상당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에 대한 후회는 없으며,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 사실들에 대해 알게 된 것에 대해서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결정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나와 다른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남이 침범할 수 없는 그들만의 권리입니다.

1980년 5월 통치체 직분을 사임한 후, 조직 내의 실제 상황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신문사와 잡지사로부터 수없이 많은 전화가 왔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브루클린 본부에 가서 직접 알아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브루클린 본부가 “노코멘트”로 일관하기 때문에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의 정보 제공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거의 2년간 그러한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하지만 그 2년 동안 일어난 일들 즉 나에게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나의 입장을 재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2년 동안, 양심적으로 조직의 가르침에 동의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과 성품과 동기가 최악의 말들로 묘사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첫째로 두려는 그들의 결심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야망이나 반항, 자존심의 산물로 치부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충절과 진리에 대한 사랑, 그리고 진실함으로 그러한 행동을 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 어떤 언급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행동을 한 사람들의 다양한 동기를 가려내려는 시도는 하나도 없었으며, 협회는 그들 모두를 무조건 “싸잡아” 매도해버렸습니다. 조직을 떠난 일부 사람들의 잘못된 태도나 나쁜 행실을 조직을 떠난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켜버린 것입니다. 설사 잘못된 태도를 나타낸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조직으로부터 받은 실망이나 낙담, 상처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했을 수 있는데, 그러한 배려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고의적으로 조작해 낸 엄청난 소문과, 심지어는 밑바닥 수준의 잡담들이 증인들 사이에서 돌고 돌았습니다. 높은 도덕적 표준을 가진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내 바꾸기를 하는 사람, 동성애자, 위선자, 혹은 자신이 교주가 되려는 이기주의자로 둔갑되었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 혹은 “치매 걸린 사람”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한 소문을 저지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매우 진실한 사람들일 수 있으며 자신들의 양심에 충실한 사람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적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출판물을 통해서 그러한 소문을 더욱 퍼뜨리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러한 거짓 증언이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지를 아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각주 43) 출애굽기 20:16; 레위기 19:16; 시편 15:3; 베드로전서 2:21-23.]

예를 들어,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언어로 당시에 수백만부가 배부된 「파수대」영문 1981년 8월 15일호 28~29면(한국어는 「파수대」 1982년 1월 1일호 15~16면)의 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 14항 때때로 여호와의 백성의 대열 가운데에서, 최초의 ‘사단’과 같이, 독립적이며, 흠을 찾는 태도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일어났읍니다. 그들은 전세계적인 형제애를 가지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섬기고자 하지 않습니다. (에베소 2:19-22 비교) 오히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대하여 “굳은 어깨”를 내밀었읍니다. (스가랴 7:11, 12 난외주 참조) 지난 세기에 걸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매우 은혜롭게 가르쳐 주신 “순결한 언어”를 헐뜯음으로, 이 교만한 자들은 예수께서 지상에 모으신 한 “무리”의 국제적인 “양떼”로부터 “양들”을 이끌어내고자 합니다. (요한 10:7-10, 16) 그들은 의심의 씨를 뿌리고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에서 베풀어지는 영적 양식의 풍성한 “식탁”에서 의심하지 않는 자들을 분리시키고자 합니다. 그 식탁은 참으로 ‘부족함이 없읍니다.’ (시 23:1-6) 그들은 개인적으로나 가정에서 작은 집단으로 오로지 성서만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러한 ‘성서 읽기’를 통하여 그들은 그리스: 교국의 교직자들이 100년 전에 가르치고 해설한 바로 그 변절된 교리로 되돌아갔으며, 어떤 사람들은 12월 25일의 ‘로마’의 농신제와 같은 그리스도교국의 축제들을 기념하는 일로 다시 돌아가기까지 하였읍니다! 예수와 그분의 사도들은 그러한 불법한 자들에 대하여 경고하였읍니다.—마태 24:11-13; 사도 20:28-30; 베드로 후 2:1, 22.

이 기사에서는 한 항을 통해서, 사탄과 같고, 독립적이며, 흠을 찾는 태도를 나타내며, 굳은 어깨를 내밀고, 헐뜯고, 교만하고, 변절된, 불법한 자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했기에 이런 비난을 퍼붓는 것입니까? 여기에 언급된 “잘못들” 중에는 조직의 가르침 중에서 불명확한 어떤 부분에 동의하지 못해서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도 포함되는데, 여기에는 또한 하느님의 영감 받은 말씀에 고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잘못”과 건물에서 열리는 큰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잘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그들을 사탄과 같은 부류로 묘사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그런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언급은 전혀 없었습니다. 정말로 믿어지지 않았던 것은, 장로들과 여행하는 감독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증인들이 이 정도의 일 만으로도 그들을 사탄과 같은 부류로 묘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며 기사와 같은 비난도 합당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싸잡아서 정죄한 협회의 태도를 그들이 발행한 「깨어라!」 2000년 6월 22일호에 실린 기사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협회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일반화시켜 버리면 실제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이 흐지부지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수법은 어떤 집단에 속한 사람들 전체를 비하시키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6면에 나오는 한 항을 읽어보겠습니다.




비 방

  • 어떤 사람들은 자기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면 사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이나 동기를 의문시함으로 그들을 모욕합니다. 비방을 하게 되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나 사상에 기억하기 쉬운 부정적인 꼬리표가 붙게 됩니다. 비방을 하는 사람은 그러한 꼬리표가 계속 붙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직접 증거를 조사해 보지 않고 그 부정적인 꼬리표를 근거로 그 사람이나 사상을 배척하게 되면, 비방한 사람의 계략은 성공한 것입니다.

아까 앞 페이지에서 인용한 「파수대」 기사를 다시 읽어보시고, 이 「깨어라!」 기사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깨어라!」 기사의 요점은 여호와의 증인에게 “이단” 꼬리표를 붙이지 못하도록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역자주 44) “이단” - 원문에서는 이단에 해당하는 “heresy”(헤레시)를 사용하지 않고 “분파”에 해당하는 “sect”(섹트)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한국에서 증인들이 실제로 자주 듣는 “이단”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영어성경 번역본들에 나오는 두 가지 단어는 모두 원래 그리스어 “하이레시스”를 번역한 단어이며, 「신세계역」에서는 일관되게 “분파”(sect)로 번역하지만, 「킹 제임스 성경」KJV과 「신 국제역 성경」NIV에서는 성구에 따라서 “sect”(분파)와 “heresy”(이단)으로 달리 번역한다. 「개역한글판」을 포함해 대부분의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이것을 “이단”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리킬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원래부터 이 단어가 멸시의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학파”나 “무리”와 같은 단어로 번역할 수 있는 중립적인 용어였다. 따라서 베드로후서2:1에서는 “파멸적인 분파”(신세계역), “멸망케 할 이단”(개역한글)처럼 앞에 부정적인 수식어를 붙여서 사용하기도 했다. 사도행전28:22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행전26:5에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사용했는데, 이 경우에도「신세계역」에서는 모두 “분파”로 번역하지만 「개역한글판」에서는 “파”로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파”와 “종파”를 섞어서 번역했다. 현재는 “분파”(sect)와 “이단”(heresy)을 문화 예술 분야에서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극히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교적으로 심각하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분명히 “변절된”(apostate)이란 말도 이와 비슷하거나 더 심하게 멸시하는 말입니다. [역자주 45) “변절된”-이 단어는 원문에서 “apostate”로 나오는데 워치타워 출판물에서는 이 단어를 명사로 사용할 때는 주로 “배교자”로 번역하고 형용사로 사용할 때는 “배교한…”,“배교적인…” 등으로 번역한다. 하지만 해당 한국어 「깨어라!」기사에서는 드물게 이 단어를 “변절된”으로 번역하였다.] 일반 증인들조차도 지도자들이 정해놓은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든지 그런 말을 들어도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모든 사람을 싸잡아 비난”하는 관행은 공정하지도 않고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증인 조직을 떠나는 이유는 실로 다양합니다. 그리고 매년 조직을 떠나는 사람들의 숫자는 상당히 놀랍습니다.

1970년부터 1999년까지 침례 받은 사람들은 전 세계적으로 658만 7천 215명입니다. 통상적으로 조직은 매년 1%의 신자가 사망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수치를 적용해보면, 1970~1999년 사이에는 98만 5천 734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30년간 침례 받은 사람들 전체 숫자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조직 안에 살아있는 사람들만 계산해서 더해 본다면, 560만 1,481명이 증가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 이전 연도인 1969년 「연감」에 따르면 활동적으로 연합하고 있었던 증인들의 총 수는 125만 6천 784명이었습니다. 이 숫자에 560만 1,481명을 더한다면 1999년에는 총 숫자 685만 8천 265명이 조직에 연합하고 있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보고에 따르면, 1999년에는 실제로 591만 2천 492명만이 연합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30년 동안 약 94만 5천 773명이 조직을 떠났거나 활동을 중단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새로 침례 받은 사람들 전체에서 14%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1999년 전 세계 보고에서 구체적인 통계들을 살펴보면 많은 나라들 특히 선진국에서의 현재 상황이 실감나게 나옵니다.

12개 주요 서유럽국가들과 영국 및 아일랜드에서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1999년에 침례 받은 수: 2만 1,376
1998년에 보고된 평균 전도인 수: 93만 3,043
1999년에 보고된 평균 전도인 수: 92만 3,143

새로 침례 받은 사람들이 21,376명인데도 불구하고, 전체 전도인 수는 오히려 9,900명이 감소했습니다. 이것은 1년 동안에 약 3만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조직을 떠났거나 “무활동”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태평양 연안의 3개 주요 국가(일본, 한국, 호주)의 증감 현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1999년에 침례 받은 수: 1만 2,162
1998년에 보고된 평균 전도인 수: 32만 5,316
1999년에 보고된 평균 전도인 수: 32만 5,972

이 나라들에서도 1만 2,162명이 새로 침례를 받고 들어왔지만, 증가는 656명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1만 2,162명이 새로운 신자가 되었지만, 1년 만에 1만 1,506명이 조직을 떠났거나 “무활동”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1999년에 침례 받은 수: 3만 4,123
1998년에 보고된 평균 전도인 수: 105만 5,950
1999년에 보고된 평균 전도인 수: 105만 1,124

34,123명이 침례를 받았지만, 전도인은 4,826명 감소했으며, 이것은 1998년부터 1999년 사이에 38,949명이 조직을 떠났거나 “무활동”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위에 언급된 19개 주요 국가들의 전도인 수를 더해본다면, 총 67,661명이 침례를 받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체 전도인 수는 증가하지 않았고, 1999년 보고가 보여주듯이 1만 4,070명이나 감소했습니다. 이것은 19개 주요 국가에서 8만 1,731명이 조직을 떠났거나 “무활동”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1999년 보고서를 보면 전 세계적으로 2%의 증가가 있었고, 일부 나라들은 뚜렷한 증가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요 나라들에서 보여준 “회전문” 상황은 주목할 만한 것일 뿐 아니라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일본과 한국은 상당히 예외적이지만, 워치타워 협회 역사 초기부터 발전과 성장의 본보기가 되었던 나라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조직을 떠나거나 활동을 중단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1970년부터 1999년에 이르기까지 30년간 조직을 떠난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 모두가 양심상의 이유로 조직을 떠났다거나, 그들 모두가 겸손하고 의로운 동기를 가진 사람이며 자신에 대한 관심사보다 진리에 대한 관심을 더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일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많은 사람들은 그와는 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부 사람들은 조직에 있을 때 혹은 조직을 떠난 이후 부도덕한 생활에 계속 몰두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조직을 나와서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증인들에 대해 복수심이 품고, 그들을 조롱하며, 절반만 사실인 말들과 과장을 사용함으로 조직이 저지른 잘못과 동일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여호와의 증인 집회와 대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도 개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삶에서 훌륭한 본을 보이면서, 하느님을 경외하고, 동정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이라는 증거를 드러냅니다. 만약 득실만으로 따진다면,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고 그들이 취했던 입장과 그 후에 계속 추구한 행로 때문에 얻은 이익은 전혀 없었습니다.

많은 경우에 이들을 괴롭힌 것은 그들 자신이 당한 부당한 처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부당한 처사, 경직되고 편협한 모습, 심지어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인 장로들과 다른 이들의 거만함, 또는 명백한 성경적 근거도 없는 조직의 특정한 규칙들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들을 보는 것 등이 그들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들은 불만스럽고 적대적인 불평을 말하기보다는 단지 더 많은 동정심을 간청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가정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아들이 보여주신 본을 따르려는 것이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동기가 순수하다는 증거로 보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진리에 대한 염려, 하느님의 말씀을 잘못 전달하는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척하는 위선을 피하려는 노력, 양심상 지지할 수 없는 것은 지지하지 않고, 성경이 정죄하지 않는 것을 마음대로 정죄하는 잘못을 피하려는 노력-이런 것들 역시 그들의 동기가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러한 마음을 분명히 가진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협회는 그들에게 “배교자”, “적그리스도” 또는 “사탄의 도구”라는 꼬리표를 달았습니다. 수없이 많은 경우를 봤지만, 협회가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양심상 조직의 가르침과 정책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느낍니다. 사실상 모든 경우에 3명~5명으로 이루어진 “사법위원회”가 그들과 비공개 모임을 가집니다. 그 모임에 증인으로 불려오는 사람들은 증언만을 할 수 있으며 모임의 토의 과정을 지켜볼 수 없습니다. 후에 회중에 간단한 제명발표가 있게 되는데, 이때 제명당한 사람의 변론이나 제명이 합법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증거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제명발표를 한 후에는 어떤 증인도 제명된 그 사람과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명당한 사람은 자신의 입장에 대해 친구와 증인 신자들에게 설명할 기회를 박탈당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제명당하기 전에 자신의 입장에 대해 친구들이나 증인 신자들에게 말했다면, 그것은 “개종 활동”, “회중의 연합을 위태롭게 하는 일”, “불신의 씨를 심는 일”이나 “분파 조장”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제명당한 후에는 그들과 대화를 하는 증인 신자는 누구라도 제명당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제명당한 그들은 효과적으로 “격리”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 문제에 대해 어떤 논의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제명처분 고발과 청취에 관한 증거 기록들이 현재 브루클린 봉사부의 많은 두터운 파일들(또는 지부 사무실 파일들) 중에 “파기하지 말 것”이란 인장이 찍힌 채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고발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파일들은, 사법모임과 마찬가지로 비공개로 보관되며, 재검토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진정한 친구는 항상 사랑하니, 그는 고난의 때를 위해 태어난 형제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각주 46) 잠언 17:17] 나는 그런 진정한 친구들이 정말, 정말로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고 결정의 순간에 이르자, 그러한 친구는 단지 몇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나는 그들이 나를 위한 변호를 거의 하지 않았거나 그 반대였거나 간에, 그런 몇 안 되는 진정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한때 조직 내에서 탁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한편 그렇게 탁월한 위치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나와 동일한 경험을 통해 본질적으로 나와 같은 대가를 치르고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몸에서 난 딸아이를 보아온 한 어머니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아기였을 때 젖을 먹이고 아플 때 간호하고 인생의 초년기에 삶에 대해 가르치고 딸아이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딸아이가 실망하고 슬퍼할 때 그래서 그 아이가 눈물을 흘릴 때 그것이 마치 자신의 아픔인 것처럼 함께 눈물을 흘린 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 딸아이가 이제는 성인이 되어서 갑자기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를 배척합니다. 단지 어머니가 자신의 양심과 하느님께 충실했다는 것이 그 이유라면, 그것이 이 어머니에게 어떤 고통을 주게 될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 이유로, 한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들이나 딸이 결혼을 하면서, “결혼식에 안 오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면, 또는 결혼한 딸이 아이를 낳았는데 손자 또는 손녀를 보러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때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많은 부모들은 바로 이런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펜실베이니아에 사는 한 어머니로부터 받은 편지는 그러한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 내게는 조직 안에 결혼한 자녀들이 있습니다. 내가 제명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자녀들은 집으로 놀러와 달라는 제안도 했었습니다. 나에 대한 인간적인 감정까지 바뀌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1981년 9월 15일호 「파수대」에 제명당한 사람과의 교제에 관해 세부적인 지시가 내려오자) (역자) 한국어는 「파수대」1981년 11월 15일호.
    그때 이후로 아이들은 나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전화통화는 물론 저와의 어떤 접촉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잘못되어서 그 애들이 나를 더 멀리 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아이들이 전화번호를 바꾸어 버릴까봐 전화도 못합니다. 편지도 못 보내겠습니다.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 나는 감정적으로 탈진하여 병원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짧은 시간에 일어난 너무나 압도적인 이런 일들로 인해 또 다른 인생의 위기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아마 형제께서도 이런 경험을 하고 계시겠지요. 나로선 어떻게 내 아이들과 (또 앞으로 태어날 손자들과) 단절된 상황을 견뎌나갈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식들을 잃는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사건입니다.

만일 나의 탁월했던 과거의 지위가, 이와 같은 양심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이들이 자기들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태도를 고치는데 어떤 면으로든 이바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 과거의 탁월함이 유일하게 쓸모 있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우리를 사실대로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또다시 우리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주어 속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만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의 말을 반박할 수 있게 해주려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우리를 받아 주십시오. 우리는 아무에게도 부당한 일을 하지 않았고, 아무도 타락시키지 않았으며, 아무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을 정죄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여러분이 우리 마음속에 있어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것입니다. [각주 48) 고린도 후서 5:11~12.「공동번역」; 고린도 후서 7:2~3.「신세계역」 (원문은 모두 「신국제역」NIV에서)]

이 책에서 제공하는 정보들이, 위에 언급한 자녀들로 하여금 그 어머니를 부끄러운 어머니가 아니라 양심을 지킨 자랑스러운 어머니로 볼 수 있게 만들 수만 있다면, 이 책을 쓰는데 들인 모든 노력은 보상을 받고도 남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 통치체에서 보낸 9년 동안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쓰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책은 논쟁의 양면을 제시하면서, 많은 사람의 가슴을 찢는 아픔의 근원을 캐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을 담아 놓았습니다.

이 책이 전달하고 있는 정보들은 어떤 것들을 “폭로”하기 위한 것들이 아닙니다. 일부 사실이 나에게 충격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충격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쓴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충격적인 내용들이 포함된 이유는 그것이 매우 근본적인 문제와 매우 심각한 논점을 잘 예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들은 “조직에 대한 충성”이 야기할 수 있는 극단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며, 기본적으로는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어떻게 불친절하고 불공정하며 심지어는 잔인한 결정과 조치를 취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별다른 예외가 없는 한, 때와 장소와 사람들의 실명을 직접 언급할 것인데, 이는 믿을만하고 사실적인 정보를 전달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실명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내가 말한 내용들이 사실에 입각한 정보라는 확신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관련된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곤란을 겪을 수 있는 경우에는 실명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가 누구인지 알게 해 주는 단서들도 거론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맥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인용한 내용들은 원래의 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본래의 의미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내가 사람들의 발언을 언급할 때는 그들의 일상적인 모습에서 벗어난 독특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발언은 인용하지 않았고, 그들의 평소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을 채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발언들은 익명을 사용했는데, 이는 그런 말을 한 당사자 또는 그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불필요한 곤란을 겪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익명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나의 진술이 의미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중 아무도 다음과 같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는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이 무심코 내뱉은 사소한 말이라도 심판의 날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네 말에 근거하여 네가 의롭다고 판정을 받을 수도 있고, 죄가 있다고 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 [각주 49) 마태복음 12:36, 37. 「쉬운성경」 (원문은 「신 국제역」NIV에서)] 우리는 잘못된 말과 상처를 준 말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하며, 그러면 용서받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에 대한 책임은 져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에 나오는 특정 내용들을 비난하면서, “우리 가족들의 지저분한 속옷까지 꼭 남들에게 보여줘야 하겠는가?”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상한 점은, 바로 이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이 정작 타 종교의 “지저분한 속옷”을 지적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그것을 널리 홍보하고 전파하는데 대단한 관심을 가지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외부사람들이 논의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 사회 내에서는 그러한 논의가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반역적인 영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되며, 또 다른 제명처분의 결과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중요한 정보를 증인사회 안에서는 다룰 수가 없는데, 조직 밖에서도 논의를 못한다면, 정보에 대한 논의를 아예 하지 말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올바른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것을 보실 수 있고 모든 문제를 최종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하실 수 있는 하느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오직 하느님께서만 모든 잘못을 온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시정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를 품고 복수하려고 하거나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중상모략”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그 점에 대해 한 점의 의문도 남기지 않습니다. [각주 50) 시편 37:5-9,32,33; 로마서 12:17-21; 베드로전서 2:21-23.] 하지만 이것은 불공정을 보고서도 전혀 말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잘못된 가르침이 널리 퍼질 때에도 계속 침묵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러한 논의는 “하느님께서 임명하신 권위를 멸시하는” 태도를 나타낸다는 증거로 간주되어야 합니까? [각주 51) 유다는 유다서 8절에서 “영광스러운 이들을 비방”하는 것에 대해 말했는데, 「파수대」영문 1982년 8월 15일호 28면(한국어는 1982년 12월 1일호 23면)에서는 이 영광스러운 이들 중에는 “임명받은 그리스도인 감독자들”이 포함되며, 그들에게 협조하고 지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위를 업신여기려는 경향”이라고 설명했다.]

조직의 입장은 그러한 불공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해왔고 또 앞으로도 할 조치들은 모두 성경과 조화되는 것이며, 사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그 문제들을 솔직하게 논의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논의는 조직의 입장의 정당성을 더욱 분명하게 해줄 것이며, 불공정한 조직이라는 비난을 씻어버릴 기회가 될 것입니다. 오직 불공정한 행위에 정말로 책임이 있는 사람들만이 침묵하고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한 예는 독재 정부와 권위적인 종교에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높은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잘못을 폭로하는 것을 포함하여 잘못을 지적했다고 꾸짖은 사례가 있습니까? 그런 예는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예언자들의 임무는 종종 그런 사람들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권위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 심지어는 대제사장들이 하느님의 표준을 범하므로 문제가 된 일들을 드러나게 하는 것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주 성서의 그러한 솔직함과 열린 태도를 성서가 진리이며 순수한 하느님의 책임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지적해 왔습니다. [각주 52) 1963년에 발행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유익하다’」(‘All Scripture Is Inspired of God and Beneficial’)책 영문, 341면 참조.
(역자) 1963년에 발표된 위 책은 60~70년대에 한국어로는 조금씩 번역되어서 회중에 낱권들로 공급되었다. 한국어판은 영문 1982년 개정판을 근거로 1983년에 처음으로 한권의 서적으로 만들었고, 영문판이 1990년에(한국어판은 1991년에) 마지막으로 개정되었다. “성서 전체에 걸쳐, 필자들의 거리낌 없는 솔직함은 성서의 신빙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된다.”라는 말과 함께 관련 내용이 1963년부터 1990년 개정판까지 모든 판에 실려 있다. 한국어판 역시 341면. ]

예수의 사도들과 제자들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산헤드린과 산헤드린의 장로들 그리고 하느님께서 조직하신 제사장 직분의 권위, 이것은 하느님의 계약 백성(언약 백성)에게는 가장 권위 있는 조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불법적인 처사를 맹렬히 대중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각주 53) 사도행전 4:5-26; 5:17-40.] 히브리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제자들 모두가 그랬습니다. 권위자들의 잘못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일의 동기는 더 높은 권위에 대한 복종과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며, 사실을 알 필요가 있는 사람들의 권익을 위해서였습니다.

분명히,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예언자나 사도로서의 직분을 부여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본받기 위해 예언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예수께서 박해받고 온갖 조롱의 말을 듣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전의 예언자들도 그와 같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각주 54) 마태복음 5:11,12. 또한 비교 야고보서 5:10,11.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이전 예언자들과 동일한 행로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예언자들과 같이 부당한 처사를 받았던 것입니다. 사도들의 본을 따르기 위해 사도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메시아가 돼야 한다거나, 메시아인척 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각주 55) 고린도전서 2:1; 에베소서 5:1; 베드로전서 2:21.]

물론, 하느님의 아들께서 받으신 부당한 대우는 오늘날 우리들이 받은 대우와 비교할 때, 그 중요성과 의미 그리고 결과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보여주듯이, 잘못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을 하느님께서 승인하신다는 이 원칙은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그 힘을 가집니다. 적어도 하느님께서는 불공정과 거짓이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매우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사람들이 올바른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현실을 일깨워주며, 도와주려는 동기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해 줍니다. “선한 사람이 침묵하면 악한 자가 활개를 친다.”는 속담이 이 경우에 적당한 말인 듯합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들의 중대성이 이 책을 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들의 심각성은 나로 하여금 이전 어느 때보다 성서의 주요 내용과 가르침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만들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면서 “그것은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므로 아무도 자랑할 근거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는지, 법을 지킴으로 얻게 되는 의로움과 하느님의 은혜 즉 과분한 친절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의로움은 실제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하느님의 아들은 그리스도인 회중의 머리로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시는지, 회중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지, 하느님께서 회중에 권위를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이며 그 권위는 어떻게 오용되어 왔는지에 대해 나는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부 핵심 인사인 여호와의 증인 통치체 성원으로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은, 이전 어느 때보다 그러한 성서의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나와 비슷하게, 인생의 갈림길에서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던 다른 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책에 나온 특정 내용들을 알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이 읽은 성경만을 기초로 비슷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위기 상황에서 혼란과 근심 가운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확신을 갖지 못하고, 심지어 죄의식에 짓눌려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 책이 그런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빚을 진 느낌입니다. 그분들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어떻게 결론을 내리든지, 이 책에서 제공하는 내용이 하느님의 영의 인도와 그분의 말씀에 복종할 수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