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내부의 동요와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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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내부의 동요와 개혁

  • 그러므로 아무도 사람과 관련하여 자랑하지 마십시오.
    아무도 인간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 고린도전서 3:21, 「신세계역」, 「공동번역」 [역자주 1) 원문에는 「신영어성서」NEB와 「예루살렘성서」JB에서 인용되었다.]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에는 장로에 대한 항목이 있는데, 여기에 제시된 장로에 대한 정보가 일련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도 각 회중들은 “회중 감독자” 한 사람의 감독 하에 있었습니다. [역자주 2) “장로”직이 폐지되었던 1932년부터 1972년까지 각 회중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회중감독자”라는 이름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장로 직분이 다시 생겨나게 되었고, 1972년 9월부터 각 회중은 장로회에 의한 감독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수 십 년간 이어져왔던 1인 체제가 적어도 회중 차원에서는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이제 한 명이 아닌 “장로회”가 감독의 직분을 맡게 되면서, 지부 조직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의 지부 조직에서는 한명의 지부감독자가 나라 전체를 감독했는데, 이는 마치 가톨릭교회에서 주교나 대주교가 여려 교회로 이루어진 넓은 교구를 감독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또한 본부에는 한 명의 협회장이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협회장을 “전 세계 회중의 주임감독자”라고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이것은 브루클린 본부에서 지부감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습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각주 3) 당시 협회장 노어는 연단 위에 앉아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불렀을 때 그는 어떤 반대 표시도 하지 않았다.]

이처럼 각 회중의 모습과 브루클린 국제본부의 모습은 눈에 띄게 달랐습니다. 그러한 부조화로 인해 “꼬리가 개를 흔드는 일”이라는 말이 연설에서 언급되기도 했으며, 그 표현은 「파수대」 기사에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역자주 4) “꼬리가 개를 흔드는 일”(tail wagging the dog)이라는 말은 영어권에서는 유명한 속담 표현인데, ‘주객전도’나 ‘하극상’의 상황을 말한다. 본문에 나오는 해당 「파수대」 기사는 1971년 12월 15일호(한국어판은 1972년 2월 15일호) “법인 단체와는 별개의 것인 통치체”라는 기사였다. 그 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더 자세한 내용은 3장 참조) - 그리하여 ‘협회’의 의결권을 가진 회원들은 분쟁이나 분열의 어떠한 근거도 있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관리 대행기관”이 그 대행기관의 사용자 즉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을 대표하는 통치체를 통제하거나 지도해야 할 경우와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원치 않는다.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개를 흔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94면에서 인용.] 이러한 사태 전개에도 각 회중과 중앙 본부의 조직상황이 왜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변명하는 것으로 애써 상황을 모면하려했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기사들은, 협회에서 의결권을 가진 회원들 [역자주 5)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 펜실베이니아 법인 정관에 의하면 연례총회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 회원들은 500명을 넘지 않게 되어있었는데, 그 무렵에는 약 450명이 있었다.]에게 암시를 보내기 위한 의도가 있었음이 거의 분명합니다. 즉, 의결권을 가진 회원들이 브루클린 본부 구조를 바꾸려하거나, 통치체 성원을 선임하는 인사문제나 운영문제에 간섭하려는 의사표명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신호를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그 연설이 있었던 1971년에 노어 협회장은 통치체에게 「왕국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기 위한 조직」책을 발행하는 문제에 대해 검토하고 결정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 책은 일종의 교회 조직과 운영에 관한 안내 책자 같은 것이었으며, 본부에서 시작하여 그 밑으로 지부, 지역구 및 순회구, 그리고 각 회중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여호와의 증인 조직에 대한 운영정책을 다룬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협회장은 통치체에게 그 책의 집필을 맡기지 않았으며, 대신 집필부 감독자 칼 애덤스(Karl Adams)에게 이 책의 기획과 집필을 맡겼습니다. (칼 애덤스는 통치체 성원도 아니었고 “기름부음 받은 자”로 공언한 적도 없었습니다.) 애덤스는 조직관리 서적을 개발하는 일에 에드워드 던랩(Edward Dunlap)과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우리 세 사람이 3분의 1씩 나눠서 쓰기로 했습니다. [각주 6) 내가 담당한 부분은 “하나님께 대한 당신의 봉사”, “회중의 순결함을 보호함” 그리고 “하나님의 승인을 얻게 할 인내”였다. ]

우리들은 통치체와 각 법인체의 관계에 대해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개를 흔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던 「파수대」 기사와 일치시키는 방향으로 집필 기준을 정했습니다. 우리가 주요 골자를 통치체에 제시하자, 통치체 성원들은 매우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당시 이러한 모습에 대해 협회장 노어는 자신의 책무와 직무를 “접수”하려는 시도로 느껴진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는 통치체가 오직 “영적인 사안”에만 관여해야 하며, 나머지는 협회가 담당할 몫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소위 “영적인 사안”이라고 해봐야, 결국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여행하는 감독자로 임명하고 승인하는 절차, 혹은 “제명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올라오는 질문들을 처리하는 일 같은 의례적인 일들뿐임을 당시 통치체 성원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75년 당시 통치체 성원들. 왼쪽부터 오른쪽 순서로.
앞줄: 유어트 치티, 프레더릭 프랜즈, 네이선 노어, 조지 갱거스, 존 부스, 찰스 페켈.
가운데줄: 대니얼 시들릭, 레이몬드 프랜즈, 로이드 배리, 윌리엄 잭슨, 그랜트 수터, 리오 그린리스.
뒷줄: 시어도어 제라스, 라이먼 스윙글, 밀턴 헨첼, 칼 클라인, 앨버트 슈로더.

토의하는 가운데 나는 통치체가 수행해야 할 “영적인 사안”에는 그것 말고도 책임 있는 일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라고 몇 차례 발언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은 모두 형제입니다.” “여러분의 ‘지도자’는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라들의 통치자들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큰 자들은 사람들에게 권세를 휘두릅니다. 여러분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각주 7) 마태 23:8,10; 20: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예수께서 하셨던 이러한 말씀들과 당시의 군주제식 운영방식은 서로 조화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1971년에 「파수대」에 기사만 싣고 실천하지 않는 모습은 분명히 정직한 방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협회장은 그것이 자신을 향한 인신공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힘을 주면서 “내가 일하는 방식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하고는, “내 방식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모든 특권을 내려놓을 테니 레이 프랜즈 형제, 당신이 맡아보는 것이 어떻겠어요?”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나는 노어 협회장이 내 말을 어떻게 그렇게까지 오해할 수 있을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 말의 취지는 통치체 운영을 개선하자는 것이었지, 관리 권한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자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에게, 내 말뜻은 누구의 잘잘못을 논하거나 인신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며, 단지 성경과 「파수대」를 통해 이해한 대로 조직을 개선하기 위해 논의하자는 것일 뿐이라고 매번 설명해야 했습니다. 나는 반복해서 말하기를, 만약 어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맡아보고 결정해야 한다면 나는 단연코 노어 협회장을 선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느끼기에 협회장은 이미 훌륭하게 일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전부터 해 왔던 일들에 대해서도 전혀 불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협회장은 이런 설명을 듣고도 별로 수긍하는 것 같지 않았으며, 오히려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더 말할수록 그를 더 화나게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설득하려고 몇 번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토의가 있을 때마다 다른 통치체 성원들은 자리에 앉아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뿐, 누구 하나 거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후에 일어난 일들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1975년까지는 아무런 개선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93년에 협회는 「여호와의 증인-하나님의 왕국 선포자」라는 역사책을 발행했습니다. 이 책에는 “현대 역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조직상의 조정”이라고 부르는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108면과 109면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직상의 조정

  • 1976년에는 이미, 노어 형제는 30여 년 간 워치 타워 협회장으로 부지런히 일해 왔다. 그는 전세계를 여러 차례 여행하면서 선교인들을 방문하고 격려하였으며 지부 요원들을 가르치고 교훈하였다. 그는 활동적인 증인의 수가 1942년의 11만 7209명에서 1976년의 224만 8390명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는 특권을 누렸다.

    그런데 1976년 여름에는 이미, 71세 된 N. H. 노어는 자신이 무엇인가에 잘 부딪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검사를 받아 보니 수술이 불가능한 뇌종양에 걸린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맡은 일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 여러 달 동안 분투하였지만, 몸의 예후는 심상치가 않았다. 그의 건강이 나빠진 것이 활동의 진전에 방해가 될 것인가?

    통치체를 확대하는 일이 이미 1971년에 시작되었다. 1975년 중에는 17명의 성원이 있었다. 그 해 내내 많은 시간을 들여, 통치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설명된 우리 시대의 세계적 전파 활동과 가르치는 활동에 수반되는 제반 사항을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방법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고려하였다. (마태 28:19, 20) 1975년 12월 4일에, 통치체는 여호와의 증인의 현대 역사에서 가장 의미 심장한 조직상의 조정 중 하나를 만장 일치로 승인하였다.

    1976년 1월 1일부터, 워치 타워 협회와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들의 모든 활동이 통치체의 여섯 소관 위원회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그 마련과 일치하게 1976년 2월 1일에, 전세계 모든 협회 지부에서도 변경이 실시되었다. 각 지부가 더는 한 명의 지부 감독자의 감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 명 이상의 장성한 사람이 지부 위원회로 일하며 그중 한 성원은 영구적인 조정자로 일하게 되었다. 위원회들이 여러 달 동안 운영된 후, 통치체는 이렇게 평하였다. “몇 명의 형제들이 상의를 하여 왕국 사업의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 유익하였다.—잠언 11:14; 15:22; 24:6.”

이 내용을 보면, 마치 제3대 협회장이었던 네이선 노어가 1975년 말 건강이 악화되자 조직상의 조정이 불가피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은 당시 통치체 성원이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노어의 건강 악화는 분명히 조직개편 움직임이 시작된 이후에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이 둘은 전혀 상관이 없는 우연한 사건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노어의 건강 상태는 통치체의 논의와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가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위에 묘사된 내용은 진실성이 결여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1975년, 두 명의 베델 장로(봉사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말콤 알렌과 베델 숙소 감독자 로버트 랭)가 통치체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에는 브루클린 본부 직원들의 상황에 대한 우려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었는데, 특히 엄격한 감독시스템이 조성한 두려운 분위기, 그리고 커져가는 실망감과 불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브루클린 본부에서 봉사(“베델 봉사”)하겠다고 자원한 사람들은 최소한 4년을 채울 것을 서약하고 들어왔습니다.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19살에서 20살 사이의 청소년들이었는데, 그들에게 4년은 자기들이 살았던 인생에서 5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입니다. 식사 시간에 나는 옆에 앉은 사람들과 대화하며 종종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기에 온지는 얼마나 됐어요?”

내가 브루클린 본부에서 일했던 10년 동안 “한 1년이요” 혹은 “2년 정도요”이런 식으로 어림잡아 말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답은 항상 “1년 7개월이요”, “2년 5개월이요”, “3년 1개월 됐습니다” 등 언제나 햇수와 개월 수까지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이 자신의 남은 형기를 일일이 계산하면서 표시하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본부에서 일하는 이 청년들은 일반적으로 솔직한 생각을 표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들과 좀 더 가까이 지내면서 친밀하게 지냈던 내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그들은 조금이라도 불만을 털어놓으면 “B.A.” 등급으로 찍힐까봐 즉 “나쁜 태도”(Bad Attitude)를 가진 사람으로 낙인찍힐까봐, 솔직한 이야기를 잘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인격체가 아니라 “기계속의 부속품”처럼 노동자 취급을 받는다고 느꼈습니다.

사전 예고도 없이 갑자기 담당 업무가 바뀌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럴 때면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아서 업무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마치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 보이지 않는 선긋기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매달 지급되는 수당 14달러는 왕국회관 집회에 갈 때 교통비로 사라집니다. (종종 그것도 부족합니다.) 가족이나 지인들이 경제적으로 풍족한 경우에는 지원을 받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최소한의 생필품 외에는 아무것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좀 더 먼 지역 특히 서부지역에서 온 경우라면, 더욱이 집안도 가난하다면 가족들과 휴가를 보내기 위해 여행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통치체 성원들은 국내외를 여행하면서 강연을 하고 돌아와서는 베델 가족들에게 인사를 전해준다는 말을 매번 전해주곤 하였습니다. 베델 봉사자들은, 협회에서 구입한 최신형 고급 승용차 올즈모빌을 자신들이 정비하고 세차해 놓으면 협회 임원들이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습니다. 그들은 매일 8시간 40분 동안 근무합니다. 토요일엔 오전 4시간 업무에, 일주일에 세 번은 집회참석, 그리고 매주 “증거” 활동까지 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은 지나치게 빡빡한 일정 때문에 지쳐 보였습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는 경우에는 어김없이 “B.A.” 등급, 즉 “나쁜 태도”로 분류되어 징계위원회에 호출되었습니다.

두 명의 베델 장로가 보낸 편지는 대략 이러한 부분을 언급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협회장은 이것을 자신의 관리방식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협회장은 통치체에게 이 문제에 대해 직접 들어보자고 요청했고, 1975년 4월 2일 이 문제에 대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서 여러 명의 베델 장로들이 증언을 해주면서 위에서 언급된 상황에 대해 보다 상세한 내용들이 밝혀졌습니다. 발언에 참가한 사람들은 특정 개인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진 않았으며, 다른 요구사항도 없었습니다. 다만 의사소통에 있어서 형제애를 나타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으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 현장을 잘 알고 배려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해결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강조했습니다. 베델 숙소 감독자인 로버트 랭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업무성과에 더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베델 봉사자 담당 주치의 닥터 딕슨은 고통을 겪고 있는 부부 봉사자들을 상담한 경험이 많았는데, 아내들은 과도한 업무를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내조를 제대로 못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으며, 그와 상담하던 자매들은 많은 경우 대화도중 울음을 터뜨렸다고 진술했습니다.

일주일 후인, 4월 9일 통치체의 공식 “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자): 회의록에 언급된 「파수대」 기사는 “법인 단체와는 별개의 것인 통치체”라는 제목의 기사를 말한다. 언급된 발행일은 영문기준이며, 한국어판은 1972년 2월 15일호이다.

  • 통치체와 협회의 관계에 대한 의견, 그리고 「파수대」 1971년 12월 15일호에 게재된 기사 내용에 대한 발언들이 나왔다. 리오 K. 그린리스, 앨버트 D. 슈로더, 레이몬드 V. 프랜즈, 대니얼 시들릭, 존 C. 부스 등 다섯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본 건에 대해 조사하고, 협회 임원들의 책무 및 관련 사항을 검토할 것이며, 두 개의 법인체에서 임원을 겸직하고 있는 N. H. 노어와 F. W. 프랜즈 그리고 그랜트 수터의 견해를 고려하기로 합의했다. 이 모든 것은 조직의 연합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다.

3주 후인 4월 30일에 개최된 회의에서 노어 협회장은 느닷없이, 모든 안건은 통치체 성원(당시에는 17명)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결정하자고 제안을 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각주 9) 이와 비슷하게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을 선출할 때도 추기경단이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해야 한다. 내 생각에 노어 협회장과 프레더릭 프랜즈는 조직 변화에 찬성표를 던지는 통치체 성원들이 분명히 그 정도로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다음은 공식 회의록에 기록된 것입니다:

  • 리오 K. 그린리스는 5인 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위원회는 노어 형제가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묻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각주 10) 이 위원회 성원 5명은 협회장 노어가 임명했다. 나는 “5인 위원회”의 사회자로 리오 그린리스를 추천했고, 표결에 따라 그가 사회자로 결정되었다.] 이 위원회는 「파수대」 1971년 12월 15일호 29항 및 760면에 [역자주 11) 영문판 기준. 한국어판은 1972년 2월 15일호 94면이다. “29항”은 영문판과 한국어판에서 동일하며, 해당 잡지 첫 번째 연구기사의 29항이다. 760면(한국어판 94면)은 세 번째 연구기사 “법인 단체와는 별개의 것인 통치체” 중 소제목 “통치체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의 전후 두 개 항에 해당한다.] 대해 매우 신중히 검토했다. 이 위원회는 현재 통치체가 협회를 지휘 통솔해야 하며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협회 측에서도 17명의 성원으로 구성된 통치체가 전 세계 회중들을 관리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각 회중 모임에서는 새로운 제도가 이미 시행되고 있지만, 베델에서는 아직 시행이 미뤄지고 있다. 이 때문에 혼란이 야기되고 있는데, 우리는 조직이 이중구조로 운영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후 장시간에 걸쳐 통치체와 협회가 협회장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한 토론이 전개되었으며, 참석자 전원이 의견을 발표했다. 시간이 다 끝나갈 무렵에 네이선 H. 노어가 위원회 의견에 동의했으며, 이어서 유어트 C. 치티와 리오 K. 그린리스 역시 동의했다. 이 세 사람은 동의한 제안서 복사본을 모든 성원들에게 전달하기로 하고, 다음 회의는 그 다음날 오전 8시에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대단히 중요한 이 문제에 대해 하느님께 기도할 시간을 가질 것이다.
  • 전달받은 제안서 복사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N. H. 노어: “나는 펜실베니아 법인 정관이 지정한 업무 관리 책임을 통치체가 넘겨받도록 할 것을 제안하며, 이 정관에서 정한 여러 가지 책임과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하는 전 세계 법인 단체들의 정관에서 지정한 책임들도 넘겨받게 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 E. C. 치티: “‘책임을 넘겨받다’는 표현은 상대편에게는 책임을 면하게 한다는 뜻이 되는데, 내가 보기에 책임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책임사항을 감독’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 리오 K. 그린리스: “나는 다음 사항들을 제안합니다. 통치체는 성서의 말씀과 조화된 방식으로, 여호와의 증인의 전 세계적인 연합체 및 그들의 활동을 관리하고 감독할 전적인 책임과 권한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하는 법인체들에 속한 모든 협회 직원들과 임원들은 통치체와 조화를 유지하고 통치체의 지시에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이처럼 통치체와 법인체들 사이에 만들어진 새로운 관계가 왕국사업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하면서 최대한 신속하게 발효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 다음날인 1975년 5월 1일에는 다시 장시간의 토의가 있었습니다. 특히 부 협회장(그동안 언급했던 「파수대」 기사를 쓴 당사자)은 이 동의안에 반대했고, 현재의 조직에 대한 어떠한 변경도 반대했으며, 회장의 권한축소 역시 반대했습니다. (나는 1971년에 그가 했던 말을 기억했습니다. 당시에도 그는, ‘새 질서’가 올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한 사람을 통해서 조직을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이처럼 반대하는 것도 이해는 했습니다.) 반면 그는 분명한 모순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언급한 ‘문제의 「파수대」 기사’(법인 단체들은 통치체가 사용하는 법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과감한 기사)에서 말했던 내용과 3인의 통치체 성원이 동의하여 제출한 ‘제안서’(협회장의 발언도 포함된 것)의 내용은 서로 어긋나는데, 왜냐하면 제안서 내용은 당시까지도 여전히 통치체가 법인 단체들을 감독할 권한을 갖지 못했음을 인정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토론의 결론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랜트 수터(Grant Suiter)가 발언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그는 협회의 총무 겸 재무이사였는데, 딱 부러지는 말투가 특징인 사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변화를 지지하는 의견을 제시했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지극히 사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협회장의 이름을 부르면서, 마치 그동안 그에게 참아왔던 것들을 쏟아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조직의 권한 조정에 대해서도 말했지만, 그에 대해서는 그리 비판하지 않았고, 다만 자신의 개인 방을 조금 개선시켜 달라고 부탁했을 때 거절당했던 일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는 발언을 계속하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입과 턱 주변 근육까지 떨리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 “우리가 기왕 통치체 성원을 할 거라면 말이죠, 그렇다면 통치해봅시다! 나는 지금까지 통치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다고요.”


    그랜트 수터(Grant Suiter)

    그의 말을 기록할 수 있을 정도로 또렷이 기억하는 것이 다행입니다. 그 정도로 그의 말은 아주 강렬했습니다. 이 말이 그의 생각과 진심을 그대로 전달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내 짐작과는 달리, 그때 단순히 순간적으로 격앙되어서 나온 말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말을 듣고 나는 올바른 동기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이 어떻게 나오든, 관련된 사람들이 성서의 원칙과 본을 면밀히 따르려는 진실한 열망으로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염려가 되었습니다.

    회의는 전체적으로 산만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는데, 그런 모습은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영은 [역자주 12) “영”(spirit)- 증인들은 “영”(靈)이라는 단어를 종종 “지배적인 분위기”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한다. 이 문장에서도 역시 회의의 분위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단어이다. ]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무 겸 재무이사의 말이 끝나고 얼마 안 되어 네이선 노어는 분명한 결론에 도달한 것처럼 장황하게 의견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발언은 자원하여 통치체 서기로 일하던 밀턴 헨첼(Milton Henschel) [각주 13) 밀턴 헨첼은 키가 컸으며 성실한 풍모를 갖고 있었다. 평상시엔 말이 별로 없었지만, 막상 말하기 시작하면 명확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편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노어 협회장의 비서로 일했으며, 이 당시에는 오십대 중반이었다.]에 의해 속기록으로 작성했습니다. 공식 회의록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습니다:

    • 통치체는 헨첼 형제가 언급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통치체가 여호와의 증인을 감독하는 기관이라고 한 「파수대」 기사의 설명대로 실천하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것을 찬성하고 반대하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 이미 「파수대」 에서 그렇게 발표를 했기 때문입니다.
      통치체는 전반적인 인도를 하고 힘과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것입니다. 통치체는 통치체로서의 책임을 맡을 것이며, 여러 부서를 통하여 그렇게 할 것입니다. 부서들을 설치 감독하고 하나의 조직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말을 마치면서 “나는 이렇게 할 것을 제안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약간 놀랐던 것은 부 협회장 프레더릭 W. 프랜즈가 이 제안에 지지를 표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이 제안서 안건은 통치체 전원의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파수대」에 4년 전에 실렸던 대범한 기사는 단지 말뿐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협회장의 이러한 의견표명으로 인해 앞으로 순탄한 변화가 나타날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전개가 바로 「여호와의 증인–하나님의 왕국 선포자」책에 묘사된 것처럼 조화롭게 연합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폭풍전야의 고요함일 뿐이었습니다.

    그 후 수개월에 걸쳐, 위임에 의해 “5인 위원회”는 통치체 성원 전원과 개별적인 면담을 실시했고, 본부에서 장기간 근무한 33명의 직원들 모두와도 그렇게 했습니다. 압도적인 다수는 조직 개편을 지지했습니다. 이 위원회는 통치체 산하의 여러 위원회들을 재조정하고 세계적인 활동의 다양한 부면들을 조정하기 위해 제안서를 만들었습니다. 위원회는 이 제안에 대해 통치체 성원들과 개별적인 면담을 했는데, 17명의 통치체 성원 중 11명이 기본적으로 찬성을 표명했습니다.

    찬성하지 않은 나머지 6명 중에는 조지 갱거스(George Gangas)가 있었는데, 그는 그리스 출신으로 따뜻하면서도 쾌활한 성격이었고 통치체 성원 중 가장 연장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정하지 않고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입장을 계속 바꿨습니다. 동유럽 출신의 찰스 페켈(Charles Fekel)은 예전에 다년간 협회 이사로 섬겼었는데,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기 위해 충성 맹세를 함으로 충절을 타협하는 일이 있었고, 그 일에 책임을 지고 직분에서 해임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얼마 전에 통치체 성원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역자주 14) 찰스 페켈이 통치체 성원이 된 것은 1974년 11월이었다. 이 회의는 1975년 5월에 있었으니, 6개월 만인 셈이다.] 그는 아주 순한 성격이었고, 토론 중에도 좀처럼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표결에서는 시종일관 다수의견에 찬성해왔으며, 이번 문제에 대해서도 별로 말이 없었습니다. 로이드 배리(Lloyd Barry)는 뉴질랜드 사람으로, 그 역시 아주 최근에 통치체 성원이 되었습니다. [역자주 15) 로이드 배리는 1949년 11월부터 1975년 3월까지 25년 이상 일본에 거주하다가, 통치체 성원으로 초대받아 1975년 3월에 아내와 함께 뉴욕 브루클린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이 회의는 그가 통치체 성원으로 일한지 두 달 만에 열린 것이다.] 그는 브루클린으로 오기 전까지는 일본에서 지부감독자로 다년간 일했는데, 일본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곳입니다. 그는 권고안에 대해서 강한 의문을 나타냈고, 특히 협회장 역할이 분산되어 손상 받게 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는 1975년 9월 5일자 편지에서 그 권고안을 가리켜 “혁명적”인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빌 잭슨(Bill Jackson) [역자주 16) 통치체 성원 ‘빌 잭슨’(Bill Jackson)은 ‘윌리엄 K. 잭슨'(William Kirk Jackson)과 동일 인물이다.]은 (특별하다고 할 만큼 대단한 정도는 아니지만) 솔직하고 겸손한 텍사스 사람인데, 인생의 상당 부분을 본부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배리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방식을 가급적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특히 현재의 관리체제 아래서 수적 증가가 훌륭하게 나타났다면 개선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장 목소리를 높여 반대를 표명한 사람은 바로 협회장과 부 협회장이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협회장이 개혁안을 제안하고 부 협회장이 이에 찬성했음에도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두 사람은 공공연하게 반대 목소리를 냈습니다.

    “5인 위원회”가 오랫동안 생활한 베델 성원들의 견해를 수집하는 동안, 베델 식사 시간에 일주일간 사회를 볼 차례가 협회장에게 돌아왔습니다. [역자주 17) 「선포자」책 234면 1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원래는 협회장 혼자 사회를 보던 것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1971년 9월 6일에는 통치체 모임에서 사회자 직책을 그 성원들의 성(姓)의 알파벳 순에 따라 해마다 윤번 한다는 결정이 있었다. 이 마련은 실제로 10월 1일에 발효되었다. 또한 통치체 성원은 주(週)별로 돌아가면서 본부 성원들의 아침숭배와 「파수대」연구를 사회하였다. 이 마련은 1971년 9월 13일에 프레더릭 W. 프랜즈가 뉴욕 브루클린의 협회 본부에서 아침 숭배 프로그램을 인도하였을 때 발효되었다.” 1971년 이후로 이 방식이 진행되다가, 나중에는 통치체 성원뿐 아니라 베델 가족 중 일부도 ‘아침숭배’(일용할 성구 검토) 사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는 현재까지 이어진다. ] 그는 이것을 한주 동안의 아침식사 때, 여러 식당(모든 식당에는 텔레비전 화면과 스피커가 연결되어 있었음)에 앉아 있는 1,200명이 조금 넘기도 하는 “베델 가족” 성원들에게 이야기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협회장은 5인 위원회가 진행하고 있던 개별 면담을 “조사”라고 불렀는데, 현재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조직의 전체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방식을 “얼마의 사람들”이 바꿔 버리려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는 “방식을 바꿔야 할 정도로 일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반복적으로 질문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 “조사”를 통해 “우리 베델 식구들이 문제가 많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만, “불평불만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대다수의 기쁨을 압도”하지는 못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현재의 체제에서 이룬 많은 성과들을 열거하면서, “협회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모두에게 촉구했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감정을 실어서 강한 어조로, 소수의 사람들이 베델 가족과 그 업무와 조직에 대해 가져오려는 변화는 “내가 죽어야만 가능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각주 18) 여기에서 인용한 말들은 당시 연설을 듣던 현장에서 필기한 노트를 보고 옮긴 것이다. 당연히 모든 발언은 천명 이상이 직접 들었던 내용이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 덧붙이자면, 네이선 노어는 당시의 현행 체제가 옳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또한, 조직에서 가장 존경받는 학자이며 성서에 관한 문제들을 다룰 때 그가 의지하던 프레더릭 프랜즈 부 협회장도 같은 의견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노어는 원래 상냥하고 따뜻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협회장이라는 “계급장”을 떼고 직분을 떠나서 개인적으로 만날 때는 그와의 교제가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그의 공적인 역할이 너무나도 자주 이러한 장점들을 가려버렸고, (물론 자신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협회장으로서의 권위가 조금이라도 침해당한다는 판단이 들 때면 즉각적이고 강렬하게 반응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도 그를 자극할 만한 언행은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회장으로서 가지고 있던 그의 권한을 넘겨받은 통치체가 나중에 보여준 비정한 행동방식을 보고서, 네이선 노어가 어떻게 생각하면서 지냈을지는 궁금합니다.

    나 역시 여러 해 동안 푸에르토리코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지부 감독자로 섬긴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감정과 반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직 내의 일반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나는 그 나라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었으며, 협회장을 대신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의 그런 기대에 맞추려고 애쓰다보니 나는 “지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내 “자리”를 끊임없이 신경 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불편했던 경험을 겪으면서 발견한 것은, 조직이 정해놓은 개념에 맞춰 살려고 노력하다보면 다른 사람들과의 유쾌한 관계가 희생되고 나 자신의 생활마저 즐겁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이런 것들이 체질적으로 나와 안 맞는다고 느꼈고, 시간이 지나면서 본부에서 본 것들을 단지 그대로 모방하려는 노력도 그만두었습니다. 그 결과 내 인생은 훨씬 즐거워졌고, 전체적으로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고 유익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협회장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내가 죽어야만 가능할 것”)은 거의 예언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런 말을 했을 때는 이미 뇌에서 악성 종양이 자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이 알려진 것은 조직 개혁이 기정사실이 되고 공식적으로 인정된 1976년 1월 1일이 지난 후였으며, 노어는 1년 반이 지난 1977년 6월 8일에 사망했습니다.

    협회장의 반대 의견도 강했지만, 똑같이 아니 더 강한 목소리로 반대했던 사람은 부 협회장이었습니다. 1975년 9월 7일에 열린 길르앗 선교학교 졸업식에서 베델가족 성원들과 초대받은 손님들(대부분은 졸업생의 가족이거나 친한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 협회장은 졸업 연설을 했습니다.


    프레더릭 프랜즈(Frederick Franz))

    프레더릭 프랜즈는 종종 흉내 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극적인(흔히 과장되고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처럼) 스타일로 연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음은 그의 연설문입니다. 이 연설문은 정확하게 옮겨 놓았지만, 글만으로는 그의 연설 전체에서 풍기는 말투나 분위기, 독특한 색깔, 가끔씩 던지는 신랄한 풍자 같은 것들을 실감나게 전달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각주 10) 연설 전체는 테이프로 녹음되었으며, 이 연설 녹음에 간단한 해설을 첨부한 것은 “해설서 출판사”(Commentary Press)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역자): 원서의 각주에는 이처럼 연설 녹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되어 있으나, 이 책을 번역하고 있는 시점(2015년 말)에는 레이몬드 프랜즈 부부가 모두 이미 사망했고, 해당 출판사의 웹 사이트(http://www.commentarypress.com)는 예전 모습이 아닌 추모 사이트로 바뀌어 있다. 대신 유튜브 사이트에서 “F. W. Franz speech”라는 검색어를 사용하여 프레더릭 프랜즈의 해당 연설 및 몇 가지 연설을 더 찾아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연설은 앞부분만 들어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무렵 통치체로부터 위임받은 5인위원회는 선교인 훈련, 임지 임명, 선교인들에 대한 감독 등의 일을 협회로부터 통치체로 가져오려는 제안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프랜즈의 연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연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이 학급의 졸업생 여러분들은 뉴욕 법인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와 펜실베이니아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협력하여 파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바로 이런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어떤 권리로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는 선교인들을 야외로 파견합니까? ……펜실베이니아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선교인들을 지구 전역에 보낼 권한은 누구에게 부여받은 것입니까?
      이러한 도전적인 질문을 떠올려보기 전에 잠시 상황을 과거로 되돌려봅시다. 이 협회는 나중에 세계적인 복음 전파자가 된 어떤 사람이 설립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20세기에 가장 탁월한 복음 전파자들 중 한 명이었으며, 특히 1912년에 세계 전역을 여행할 당시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펜실베이니아 앨러게이니 출신의 찰스 테이즈 러셀입니다.”

    초점은 분명히 협회에 맞춰져 있으며, 통치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습니다. 연설에서 묘사했던 “도전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은 물론 없었지만, 이 연설에서 진짜 심각하게 여겨지는 문제는 통치체와 협회와의 관계에 대해 4년 전에 했던 연설과 현재의 연설 중 어느 쪽이 그의 진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무튼 그의 독특한 연설은 계속 됩니다.

    • “나는 이 문제를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적이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러셀은 어떻게 복음 전파자가 된 것입니까? 누가 그를 복음 전파자로 만들어주었습니까? … 그리스도교국 안에서도 다양한 종교단체들이 설립되었고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영국 국교회는 ‘집행 기구’(Ruling body) [역자주 20) 본문에 나오는 “집행 기구”라는 말은 “ruling body”라는 영어단어를 번역한 것이며 한국 성공회에서는 “집행 기구”라 부르지 않는다.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는 전 세계를 통제하는 중앙집권체가 없이 각 나라의 성공회가 연합된 형태이며, 나라별(즉 교구별)로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한다. 그러한 최고 의결 기구를 대한성공회에서는 “교구 의회”라고 부른다.]가 있었으며 개신교 감독교회(미국성공회)도 ‘집행 기구’가 있었습니다. 감리교회는 협의회(Conference)가 있었습니다. [역자주 21) 감리교회에서 사용하는 “협의회”라는 단어는 영어단어 "conference"를 번역한 것이며,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연회”(年會)나 “총회”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러셀이 다녔던 장로교회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총회’(Cynod)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러셀이 나중에 연합했던 회중교회도 있었는데, 거기에는 ‘중앙 회중’(Central Congregation)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역자주 22) 미국 회중교회는 한국에 선교인을 파견한 적이 없다. 다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 회중교회의 영향으로 “조선 회중교회”가 일시적으로 존재했으며, 일제의 패망과 함께 다른 개신교 교단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그런 조직들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고서 … 러셀은 복음 전파자이자 선교인이 되었습니다.”

    연설에서 직접적으로 “통치체”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집행 기구” 등 여러 가지 이름들을 빌어서 결국 통치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입니다. (차라리 예수회를 언급하는 것이 좋을 뻔 했습니다. 예수회에 있는 관리 기구의 이름도 “통치체” [역자주 23) 영어권에서와 달리 한국에서는 예수회(Jesuits)의 최고 의결 기구를 “통치체”(Governing Body)라 부르지는 않는다.]이기 때문입니다.) 요점은, 통치체에 해당하는 그런 것들이 워치타워 협회를 설립한 러셀에게 권위를 행사하거나 다른 어떤 일을 시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러셀은 그들 중 누구로부터도 임명받지 않았으며, 자신이 “독립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통치체가 임명한 “5인 위원회”는 전 세계적인 사업을 돌보기 위한 영구적인 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 협회장은 예수께서 칠십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셨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말을 이어갔는데, 그의 연설 속에는 어떤 의도가 함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졸업생들에게 계속 연설합니다:

    • “칠십 명의 복음 전파자들을 파견하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상상하지는 않습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을 때는, 두 명을 하나의 위원회로 각각 조직하시고 그렇게 해서 70명의 복음 전파자들을 서른다섯 개의 위원회로 만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 여러분은 오늘 졸업한 후에 선교인으로 파견되는 것입니다. …… 두 사람은 볼리비아로 파견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지역으로 파견될 것이고, 어쩌면 넷이나 여섯 혹은 여덟 명이 한꺼번에 갈 수도 있으며, 아니면 각각 다른 나라로 가서 직무를 수행하라고 임명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선교인 여러분들이 둘씩 짝이 되어 파견될 때, 아니 혹시라도 네 명이나 여섯 혹은 여덟 명이 파견될 때라도, 파견되는 나라와 지역의 업무를 접수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라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결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선교인 짝과 협력하면서, 해당 지역의 워치타워 성서책자협회 지부와 협력하기 위해서 개개인의 선교인으로 파견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니라 해당 나라의 지부 사무실이 업무를 운영하고 감독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런 위원회에 관한 발상을 머릿속에서 상상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연설 내용에서는 통치체가 협회의 그늘에 가려 언급이 안 된 것 같지만, 오히려 강조된 셈이었습니다. 아무도 선교인들이 “위원회” 자격으로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업무를 접수”하기 위해 임지로 간다고 말하지도 않았으며, 그런 발상 자체를 생각하지도 않았겠지만, 연사의 말은 ‘위원회’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을 갖도록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연설은 “복음 전파자” 빌립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에서도 “누가 그를 복음 전파자이자 선교인으로 만들었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각주 24) 사도행전 8:5-13; 21:8. 참조.]

    부 협회장은 사도행전 6장을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사도들이 특정 과부들이 차별받는 것에 대한 불평을 해결하기 위해 빌립을 포함하여 일곱 명을 임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음식 분배에 관한 일을 관리하도록 임명받은 것입니다. 그는 연설을 계속 이어갑니다:

    • “자 이제, 여러분이 매클린톡과 스트롱 공편 「종교 지식 백과사전」을 찾아본다면 사도들이 일곱 명에게 할당한 일을 가리켜 “준 세속적인 일”(semi-secular work)이라고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이러한 준 세속적인 일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일곱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면서 짐을 덜 수 있었는데, 그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 일을 잘 처리하세요. 우리는 기도와 가르치는 일에 전념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열두 사도들이 식탁을 돌보는 책임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하느님과 예수그리스도의 회중에서 그들이 장식용 허수아비들이 된 것입니까? [역자주 25) 여기서 “장식용 허수아비”로 번역한 영어 단어는 ‘figureheads’로서, 배 앞부분에 붙이는 조각상(이물장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유적으로는 ‘권한 없이 명목상으로만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영적인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해서, 자신들을 허수아비로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협회장이 통치체에게 “순수하게 영적인 일”에만 전념하고 나머지 일은 협회에 맡기라고 했던 말을 통치체 성원들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부 협회장의 이러한 말은 낯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통치체 성원들 중 절반은 매일 여덟 시간 사십 분간 바로 그러한 “준 세속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니얼 시들릭과 찰스 페켈은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리오 그린리스는 비서 겸 재무담당 사무실에서 보험관련 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존 부스는 베델 주방에서 감독하는 일을 했습니다. 빌 잭슨은 법률 관련 문제와 서류들을 처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랜트 수터는 날마다 재정 문제, 투자, 주식, 유언 처리 등의 업무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밀턴 헨첼과 협회장(그는 업무를 배분하는 역할을 했음)도 그런 종류의 일들에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 협회장의 말을 빌리자면 그런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서 짐을 덜어야 할 “준 세속적인 일”이었습니다.

    부 협회장의 설명은 여기에서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기원 1세기 이후로 하느님께서는 통치체에게 권위를 부여하셨다는 공식적인 교리와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바울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개종한 사울이 변화된 후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 전체가 아니라 사도들 중 단지 두 사람만 만났다는 것, 그 후에 시리아에 있는 안티오크(안디옥)까지 가게 되었다는 것 등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면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타르수스(다소)의 사울을 선택하시고 임명하실 때 “지상에 있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단체와도 의논하지 않으시고 그 일을 직접 하셨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활동과 관련해서는, 안티오크의 역할이 예루살렘의 역할보다 더 컸다는, 일종의 “두 도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독자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현재 워치타워 조직의 공식 가르침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에는 모든 그리스도인 회중을 감독하던 통치체가 존재했으며, 이것이 바로 오늘날 현존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에 대한 근거이자 선례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 활동으로 이끌어내는 장면에서 부 협회장이 계속해서 강조했던 점은, 그 두 사람이 (사도들의 모임이 존재하던 예루살렘을 통해서가 아니라) 안티오크 회중(안디옥 회중)을 통해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각주 26)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통치체’나 권위에 대한 증인들의 가르침은 성서 시대 예루살렘에 권위를 가진 통치체가 존재했다는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바울이 안티오크 회중에서 섬기고 있을 때, 안티오크는 시리아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시리아에 있었습니다, 갑자기 성령은 안티오크에 있는 그 회중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안티오크에 있는 이 회중의 모든 사람들, 너희는 모든 일을 뒤로하고 내가 임명한 일을 수행하도록 정한 두 사람 곧 바울과 바나바를 준비시켜야 한다.” 그래서 안티오크 회중은 지시에 따라서 사울이라고도 불렸던 바울 그리고 바나바에게 손을 얹는 일 (역자): “손을 얹는 일” - 많은 한국어 성경 역본에서는 이것을 “안수”라고 번역한다.
      을 하였고 그들을 떠나보냈습니다. … 그들은 안티오크 회중을 통하여 나타난 성령의 작용으로 파견되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첫 번째 선교 임지를 향해 떠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혹은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하는 조언을 지상에 있는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듣지 않으셨고, 회중에 직접 행동을 취하심으로서 회중의 머리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그분은 사울과 바나바를 안티오크 회중의 사도로 임명하신 것입니다.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이쯤에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 “이분은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 것일까? 협회와 협회장의 권위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통치체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건 알겠는데, 하지만 자신의 말이 오히려 다른 뜻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걸까?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진행하는 이야기들이 오히려 교리 전체를 흔들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기원 1세기 당시에 예루살렘에 통치체가 존재하고 있었고 그들은 참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회중이 어느 곳에 있었든지 회중들의 모든 문제에 대해 직접 인도하고 감독하고 있었다는, 협회 간행물을 통해 여호와의 증인 절대 다수의 마음속에 확고하게 심어지고 자리 잡은 개념을 연설이 허물고 있는 건데.”

    하지만, 부 협회장은 여기에서 이야기를 끝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더 힘 있게 자신의 발상을 전개시켰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첫 번째 선교여행을 마칠 무렵을 묘사할 때에는 목소리에 더 힘이 들어갔고 더 극적인 음성으로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 “ … 그리고 그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어디로 가서 보고했습니까? 기록은 이렇게 알려줍니다. 여러분이 직접 사도행전 14장이 끝나는 부분을 읽어보시겠습니까? 그들은 안티오크에 있던 회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겪었던 일들에 대한 경과를 그 회중에 있던 사람들에게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 회중은 자신들을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에 의지하게 해주었으며 선교 활동을 하게 만들어준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 기록은 그들이 안티오크에 머물렀다고 나오는데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이제 무슨 일이 발생했습니까? 갑자기 무언가 일이 생기게 되었고,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무엇이 그들을 예루살렘까지 가게 만들었습니까?
      글쎄요, 혹시 예루살렘 회중에 있던 사도들과 다른 장로들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그들을 호출하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보게! 자네 두 사람은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는데도 아직까지 우리에게 보고하러 예루살렘에 오지도 않았네. 우리가 누군지 모른단 말인가? 우리는 예루살렘 공의회란 말이네.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직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만약, 자네들이 당장 서둘러서 여기에 오지 않는다면, 자네들을 징계 조치하겠네!”
      기록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음, 만약에 그 예루살렘 회의가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런 식으로 했다면, 즉 그들이 성령의 작용으로 자신들을 파견한 회중으로 가서 보고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징계 조치를 취했다면, 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유대인 회중의 다른 장로들은 자신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직분 위에 스스로 높이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논리는 확실히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논리는 협회 출판물들을 통해 제시된 견해와는 완전히 대립되는 것이었습니다. 출판물에서는 예루살렘에 근거지를 둔 통치체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하느님의 권위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통치체가 모든 그리스도인들 위에 감독과 권위를 행사했다고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부 협회장의 연설은 보통 「파수대」기사의 원고로 사용되었는데, 이 연설만큼은 결코 기사로 나오지 않았던 것도 분명히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만약에 어떤 증인이 연설에서 이런 견해를 제시한다면, 그 연설은 이단적이고 반역적인 연설로 간주될 것입니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적용한다면, 지상에 존재하는 어떤 회중이든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의 인도가 있다는 확신이 들 때는 브루클린 본부든 지부사무실이든 어떤 곳과도 상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선교인들을 파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면, 내 생각으로는 협회 본부와 지부사무실에서 신속하고도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중앙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될 것이고, 해당 회중은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를 통해서 작용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직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이 졸업식에서 부 협회장이 한 말들은 전부 정확히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4년 전에 했던 “꼬리가 개를 흔드는 일”에 관한 강연만큼 강한 설득력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안티오크의 사례를 들어, 협회가 통치체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서 수평적으로 운영되는 모습을 그리려고 시도한 부분은 선명한 것이었습니다.

    연설은 계속 이어져,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갔던 진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15장에 의하면, 예루살렘 자체가 안티오크 회중에 일어난 심각한 문제의 진원지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율법과 할례를 준수할 것을 강요하면서 소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찾아간 여행은 통치체에게 굴복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단지 이들 예루살렘 말썽꾸러기들의 가르침이 초래한 결과를 진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연설은 바울과 그의 새로운 짝 실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함께 수행한 제2차 선교여행을 다루면서, 그들을 파견한 것은 안티오크 회중이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다시 안티오크 회중은 성서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선교인들을 파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안티오크로 다시 돌아갔고, 바로 그곳에서 바울은 제3차 선교여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부 협회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 “지금까지 우리는 성서 역사에 기록된 선교인들 중에 가장 탁월한 선교인으로 꼽히는 두 사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특히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점은 그들을 보내신 분은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며,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는 협회가 설립된 이후로 계속 그분을 드높이고 그분께 순종해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과, 다른 어떤 조직이나 그 어떤 누구와도 전혀 관계없이 그분께 직접 지휘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행사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부 협회장이 말한 이 마지막 세 문장은 근래에 들어 일부 여호와의 증인들이 취한 입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와 동일한 견해를 밝혔을 때 그들은 “배교자”로 낙인찍혔습니다. 지금도 낙인찍히는 그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들이 아무리 그리스도의 탁월한 권위를 깊이 존중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다른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며 다른 권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부 협회장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워치타워 성서책자협회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협회장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같다는 주장입니다. 그는 통치체에 의해 임명된 “5인 위원회”의 생각과 행동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시를 대표한다고 믿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협회를 설립하셨으며 협회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추리는 복잡하게 엉킨 것 같았습니다.

    그의 전체적인 연설은 성서에 기록된 일들을 현재 사건에 적용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는 찰스 테이즈 러셀의 성공과, 그가 새롭게 창간한 「파수대」 잡지를 언급하면서 “이 사람이 그런 일을 하도록 누가 승인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러셀이 시온의 워치타워 성서책자협회를 법인체로 등록했을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여러분, 그가 워치타워 성서책자협회를 설립했을 때, 그는 아무것도 못하는 협회나 조직을 설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성령이 러셀을 일으켜 세우셨으며, 또한 “활동적으로 일을 수행하는 협회”를 설립하도록 후원하셨다고 말했습니다. 부 협회장은 이어서 길르앗 학교의 설립 경위를 설명하면서, 이 학교는 협회장이 설립을 제안한 것이며 이사회가 후원했다는 것, 그리고 협회장은 학교의 감독을 맡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도 설명했습니다. 부 협회장이 연설하는 동안 네이선 노어는 연단에 앉아 있었는데, 이런 설명을 할 때 프레더릭 프랜즈는 협회장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여러분 보십시오, 친애하는 벗들이여, 뉴욕 법인과 펜실베이니아 법인의 이사회는 창립을 후원하면서 협회장의 직분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직의 협회장을 “아무것도 못하는 협회”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는 장식용 허수아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나는 연설 초반부터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말하더라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할 때 그는 말투도 부드러운 음색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날인 1975년 9월 7일을 언급할 때는 이야기가 절정으로 치달았습니다:

    • “여러분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이 달력, 이스라엘 지역에서 가져온 이 히브리 달력에 따르면[손에든 작은 팜플렛을 가리키면서], 왜 오늘이 음력으로 1976년 티슈리 월 2일이 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졸업식이 있는 오늘이 바로 인간이 지상에 존재한지 일곱 번째 천년기가 시작한 둘째 날이라는 사실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웅대한…[여기에서 박수갈채 소리] 인류가 존재한지 일곱 번째 천년기가 시작되는 이 웅대한 날에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는 정관이 정한 규정에 온전히 따라서 길르앗 선교학교 제 59기 졸업생을 파견하는 바입니다.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틀림없이 그 열매를 통해 축복해주셨습니다. 협회가 여호와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승인된 도구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협회가 선교인들을 파견할 권리와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벗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안티오크 회중을 사용하여 1세기 당시에 가장 탁월한 선교인이었던 두 사람 즉 바울과 바나바를 파견한 것과 같이, 오늘날에도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는 펜실베이니아 워치타워 성서책자협회와 뉴욕 법인은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선교인들을 먼 곳으로 파견하면서 앞으로도 이러한 과정을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각주 28) 이 연설에 이어 협회장 노어의 연설이 있었는데, 그는 감동을 받은 모습으로 감정에 북받쳐 거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는 프레더릭 프랜즈의 연설에 감사의 뜻을 밝혔는데, 나는 그가 정말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는 이 연설을 “매우 유익한 연설”이었다고 칭찬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부 협회장의 마음속에는 누군가가 협회장의 지위에 도전하는 “결투신청” 모습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연설을 이용하여 신중하면서도 단호하게 전선(戰線)을 그었던 것입니다. 협회는 주권 지역을 갖고 있는데 통치체는 들어올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동료들로 구성된 통치체가 침략자 역할을 하는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권위로 마련하신 “승인받은 기관” 즉 협회에 무례한 태도를 나타내는 자들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졸업식에 참석한 손님들, 즉 졸업생들의 부모와 벗들은 연설의 많은 내용들 때문에, 그리고 특별하게 초점을 맞춘 내용들 때문에, 또한 가끔씩 튀어 나오는 과격한 말투 때문에 어리둥절해했습니다. 베델 가족 성원들은 그동안 협회장과 부 협회장이 식탁에서 사회를 볼 때 했던 말들을 알고 있기에 막연하게나마 무슨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통치체 내부에서 다툼과 심각한 권력 투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의심을 더 확실히 굳히게 되었습니다.

    이 연설은 예전에 개와 꼬리를 비유하며 이야기했던 연설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연설이었습니다. 비유적으로 개와 꼬리에 대해 이야기했던 연설과는 너무나 비교가 되는 연설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개”는 통치체를, “꼬리”는 협회를 상징. 꼬리인 협회는 몸통인 통치체를 흔들 수 없다는 내용.) 4년 전의 연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동일한 사람이 연설한 것인데도 두 연설의 전개 방향은 정 반대였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졸업식이 있던 대회 회관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무척 혼란스러웠고, 그 때문인지 몸까지 불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이용하고, 자신의 입장이 바뀌면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정 반대로 이용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바로 이점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네이선 노어와 마찬가지로 프레더릭 프랜즈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1941년 말, 협회장 러더퍼드 판사가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벳사림 저택에서 임종을 맞이할 무렵에 세 명, 즉 네이선 노어와 프레더릭 프랜즈, 헤이든 커빙턴을 자기 곁으로 불렀습니다. [역자주 29) 브루클린 본부에서 찾아간 이 세 명은 며칠 동안 벳사림에서 러더퍼드와 함께 머물렀으며, 러더퍼드는 그들이 돌아간 후 3주일 만에 사망했다.] 러더퍼드는 자신이 죽고 난 이후에도 그들이 직무를 계속해서 수행해주기를 바랐으며, “똘똘 뭉쳐서” 한 팀으로 일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 러셀의 “유언”을 떠오르게 하는데, 러셀이 유언을 기록으로 남겼던 것과는 달리 러더퍼드는 말로 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거의 20년이 지나서 1961년에 프레더릭 프랜즈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되게 하옵소서”」(“Let Your Name Be Sanctified”)라는 책을 썼을 때 그 상황도 적었는데, 그는 그 상황을 엘리야가 자신이 입었던 예언자의 망토(신세계역에서는 “공복(公服)”으로 표현[역자주 30) “예언자의 망토”(prophetic mantle)의 다른 표현으로 소개된 괄호 안의 “공복(公服)”은 한국어 신세계역 1999년판에 나오는 표현이다. 영문판은 이전판과 2013년 개정판에서 동일하게 “official garment”를 사용했지만, 한국어 2014년 개정판은 “공복”대신 “겉옷”으로 번역하면서 각주에는 “예언자의 옷”으로도 번역할 수 있음을 표시했다.])를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에게 전달하는 장면과 넌지시 연결시켰습니다. [각주 31) 열왕기하 2:8, 11-14.] 그는 이것을 마치 예언적인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표현했는데,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4 러더퍼드는 태평양 연안 근처 병상에 있었습니다. 때는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미국이 제 2차 세계대전에 돌입할 때였습니다. “벳사림”이라고 불리던 저택에서 지내던 러더퍼드는 브루클린 본부에 있던 3명에게 자신을 찾아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 중 두 명은 기름부음받은 남은자(한 명은 1913년부터, 다른 한 명은 1922년부터)에 속했고 다른 한 명은(1934년부터) “다른 양”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본부에서 출발하여 러더퍼드의 침상 곁까지 찾아갔습니다. 1941년 12월 24일에, 그는 세 사람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였습니다. 그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비롯한 충실한 예언자들이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신세계에서 왕국이 된 "온 땅의 방백(군왕)들"로 등장하는 장면을 보기를 다년 간 기대했었습니다.(시편 45:16) 그러나 1942년 1월 8일 목요일에, 러더퍼드는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사망할 때까지 그는 여호와 하느님의 충실한 증인으로서, 하느님의 왕국 권익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우주 통치라는 중대한 쟁점에서 여호와의 편에 서는 일에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임을 증명했습니다.
  • 5 이것은 지금의 우리가 볼 때는, 마치 엘리야가 자신의 직무를 엘리사에게 넘겨주었던 일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강물이 갈라져서 엘리야와 엘리사가 함께 요르단 강을 건너고, 동쪽 강가에서 엘리사가 퇴임하여 사라질 때까지 함께 걸었던 때와 비슷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옷 즉 공복(公服)을 상속받았습니다. 그 옷과 함께 그 힘도 전달된 것입니다. [각주 32) 1961년에 발행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되게 하옵소서”」(“Let Your Name Be Sanctified”)책 영문, 335-337면.]
  • 통치체가 조직개편 제안에 대해 토의할 때였습니다. 부 협회장은 러더퍼드 판사가 임종할 때 그의 권한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프레더릭 프랜즈는 그 임종 순간에 “망토 전달” 사건이 일어났다고 느낀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러더퍼드의 뒤를 이어 네이선 노어가 협회장이 되었습니다. 노어는 헤이든 커빙턴이라는 사람에게 부 협회장 자리를 제안했습니다. 헤이든 커빙턴은 몸집이 큰 텍사스 사람으로, 그 이전에 미국 대법원까지 가게 된 많은 사건들에서 여호와의 증인 측을 위해 변호를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기름부음 받은 자” 반열에 속해있다고 공언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 사례는, 러더퍼드 판사뿐 아니라 네이선 노어 역시, “기름부음 받은 자”가 아닌 사람도 세계적인 사업에서 중요 직책을 맡을 수 있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줍니다.) 스코틀랜드의 월시 재판에서 커빙턴 자신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커빙턴은 부 협회장이 된지 몇 년 후 자신의 직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편지를 받았고, 자신이 “기름부음 받은 자” 신분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노어와 상의한 끝에 사임하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각주 33) 공식 재판기록 387,388면 참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결국 커빙턴은 본부에서의 직무를 떠나서 개인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각주 34) 커빙턴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투쟁을 했다. 그는 금주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본부에서의 봉사를 계속했다. 그는 결국 제명되었고, 그 후 미국 데이턴에 있는 스피어스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이 문제를 완전히 극복했다. 그리고 복귀한 후에는 사망할 때까지 조직과 연합했다.] 커빙턴이 1944년에 부 협회장 직에서 사임했을 때, 그의 뒤를 이을 후임으로 프레더릭 프랜즈가 선택되었습니다.

    러더퍼드가 사망할 당시에 당부했던 대로 그의 책임을 상속받은 세 사람은 (이것을 보면 당시에는 “통치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두 사람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래도 부 협회장은 여전히 예언 성취를 위한 역할을 받았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1978년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열린 큰 대회에서, 이제 협회장이 된 프레더릭 프랜즈는 3만 명의 청중에게 증인생활에서의 경험담을 이야기했습니다. 경험담의 상당부분은 이제 고인이 된 네이선 노어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는데, 특히 러더퍼드 판사가 임종하기 전 자신들에게 했던 말의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프레더릭 프랜즈는 네이선 노어에 대해 묘사하면서 상당히 훌륭한 인품이라고 칭송하면서, 자신은 “판사의 강권대로” 노어와 똘똘 뭉쳐 끝까지 협력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망토 전달”의 의미에 대해 가졌던 이런 시각은, 같은 해인 1978년에 열린 통치체 집필 위원회에서 토의하던 회기에서 더 명확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 곳에는 라이먼 스윙글, 유어트 치티, 로이드 배리, 프레더릭 프랜즈가 참석했으며, 나도 참석했습니다. 그 당시에 에드워드 던랩은 야고보서를 해설한 주해서(주석서)를 집필하고 있었는데, 프레더릭 프랜즈는 야고보서 3장 1절 부분에 대한 던랩의 해설을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해당 성구는 제자 야고보가 한 말로, 다음과 같습니다.

    •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가르치는 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더 무거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던랩이 만든 초안에는, 자격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단순히 탁월해지려는 욕망 때문에 교사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경고한 것이라는 해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레더릭 프랜즈는 특별한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고, 이 성구에 대한 해설 거의 전부를 삭제해달라면서 다음과 같이 서면으로 요청했습니다:

    • 만약 예수께서 일부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로 마련해 주셨다면, 그분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교사로 주셨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 그때 이래로 계속해서 가르치는 자들을 보내고 계신다면, 야고보가 “가르치는 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 야고보 자신은 어떻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 주해서를 개발하고 집필하는 과정을 감독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나는 집필 위원회 청문시간에 프레더릭 프랜즈에게 기존 원고에 반대하는 이유를 명확히 밝혀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또 해당 성구가 정확히 무슨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우리에게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 회중 전체에서 “가르치는 자”가 될 사람은 매우 극소수여야 한다고 믿으며, 이것이 이 구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는 누가 그런 사람에 해당하는지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매우 차분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 “음, 나는 그것이 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곳 본부에 오십년 이상 있었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필과 연구 분야에서 열정을 쏟아 일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런 사람에 해당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 지구 전역의 다른 형제들 중에도 그런 사람에 해당하는 이들은 약간 더 있을 것입니다.”

    이 대답을 들었을 때 나는 너무나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말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이 말은 나 혼자 들은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다른 세 명의 집필위원들도 들었습니다. 그의 선언으로 우리는 지상에서 “가르치는 자” 중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프레더릭 프랜즈였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추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라이먼 스윙글에게도 말했지만, 그때 프랜즈 외에 다른 ‘교사’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끝까지 캐묻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울 뿐입니다. 하지만 그 때는 그의 말을 듣고 정말 말문이 막혀서 그럴 경황이 없었습니다. 던랩의 해설에 반대하면서 제출했던 그 문서에서, 프랜즈 협회장은 집필중인 주해서에 다음과 같은 요점을 추가해줄 것을 암시적으로 요구했습니다. (다음은 그때 제출한 서류의 2번째 쪽입니다. 여기에는 그의 약식 서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집필중인 야고보서 3장 주석에 대한 교정 및 변경 FWF
      야고보서 3장, 2면

      5항에 이어서 나는 다음 항을 추가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야고보가 가르치는 자가 되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의 이부 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되신 후에 그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7; 사도행전 1:14) 헌신하고 침례 받은 그리스도인 남자 중 누군가가 “가르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기적인 욕망이 동기가 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처럼 올바른 동기로 가르치는 자가 된 경우를, 1879년 7월에 27세의 나이로 시온의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 잡지의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된 찰스 테이즈 러셀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1975년에 길르앗 학교 졸업식에서 했던 그의 연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목회자 러셀을 일으키셨다고 명확히 말했습니다. 그 연설에서 밝힌 그의 견해는 3년 후에 표명한 견해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그가 느끼기에는, 러셀 이후로 그리스도께서 회중을 섬길 특별한 “교사”를 세워주신 경우가 더 있었는데, 오직 소수의 사람만 그러한 선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각주 35) 몇 번의 통치체 회기에서 칼 클라인은 프레더릭 프랜즈를 지칭하면서, 여러 해 동안 조직의 ‘신탁자’(oracle)로 지내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비록 웃으면서 말한 것이지만, 여러 번 반복해서 그런 말을 한 것으로 보아 가벼운 농담 이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러셀을 예로 들면서 변경을 요구한 내용이 본문에 실제로 반영되지는 않았습니다. 「야고보서 주해」책 99면부터 102면 첫 부분까지는 프랜즈 협회장의 반대 의견을 참고하여, 던랩의 초기 원고를 내가 고쳐 쓴 내용입니다. 하지만 협회장의 견해를 논박한 부분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8절에서 “그러나 여러분은 랍비라고 불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선생은 오직 하나이며 여러분은 모두 형제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극소수의 사람으로 이루어진 집단 개념, 혹은 ‘선생’으로 특별히 선택받은 소수의 독점적인 집단 개념과는 철저히 상반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시 써서 제출한 부분은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서 출판된 책에 포함되었습니다.

    출판물로 인쇄되어 나온 내용은 그처럼 대범하고 힘 있게 표현되어 있는데 왜 실제 결과는 그토록 초라하고 볼품없는지, 그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협회 임원들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큰 변화를 만들기보다는, 작은 조치로 생색만 내면서 충분히 변화되었다고 합리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1971년에 노어 협회장은 베델 식사 시간에 사회를 볼 독점적 권리를 법인 이사회 성원들에게도 나눠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통치체 회의 사회자 직책은 해마다 윤번제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법인체들 및 협회 임원들이 통치체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즉 드디어 “개가 꼬리를 흔드는” 상태가 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권위 구조 개혁에 대한 효과적인 조치나 중대한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감동적인 그림을 그려주지도 못했습니다.

    프레더릭 프랜즈도 분명 비슷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때보다 무려 20여 년 전이었던 1944년에 그가 쓴 「파수대」 기사들에서는 훗날 「보조서」책에서 장로와 감독자에 관한 항목을 다룬 기본 요점이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각주 36) 1944년 10월 15일호 「파수대」영문. 또한 1999년에 발행된 책 「다니엘의 예언에 주의를 기울이라」 178,179면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일인지 회중 업무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런 말을 했으니까 그렇게 출판되었다’는 정도이고,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 기사는 1944년을 성서 예언에서 주목할 만한 해였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워치타워협회에 기부금 10달러를 낼 때마다 하나의 투표권이 주어졌던 규정을 그 해에 폐지하고 수정 조항을 채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투표권은 협회 이사회에서 선정한 사람들에게만 최대 500명까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워치타워협회 연례 총회에서 이사 선출에 참석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투표는 정해진 대로 하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습니다. 표결권을 가진 대부분의 회원들은 협회 내부에서 진행 중인 일에 대해 사실상 아는 것이 없었고, 협회가 하려는 일이나 정책에 대해 영향력도 없으며 발언권이나 조정 권한도 없었습니다. 실질적인 업무와 관련된 시간은 보통 한 시간을 넘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례총회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일 년 내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집니다.

    하지만 「파수대」 1971년 12월 1일호 기사(프레더릭 프랜즈가 집필)에서는, 회원들의 투표권에 관한 조항을 수정한 일을 다니엘 8:14에 나오는 예언과 연결시키면서, “거룩한 곳이 반드시 올바른 상태로 복구될 것”이라는 말씀과 2,300일이라는 예언적 기간에 적용했습니다. 그 일을 예언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진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증인들에게 다니엘 8:14을 보여준다면, 협회에서 투표권 수정 조항을 채택한 1944년 사건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천 명 중에 한 명이라도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이것이 그 예언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입니다. 이것은 사소한 일을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상징적 가치를 부여하는 재능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입니다.

    1975년 8월 15일, 마침내 5인위원회는 최종 조사보고서와 제안서를 제출했습니다. 나는 위원회의 의견을 대표하여 45쪽에 달하는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그 문서에는 역사적 근거와 특히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절대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구조를 변경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여기에 추가로, 여러 부서를 관할하기 위한 통치체 위원회들의 구조를 19쪽에 걸쳐 간략하게 정리했습니다. 첫 번째 문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습니다.

    • 우리 5인 위원회는 매번 많은 기도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이 문제를 심사숙고했습니다. 우리는 결론을 내리는 데 하느님의 영의 인도가 있었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이것이 통치체가 최종 결정을 내릴 때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만약 조정안 제안이 승인될 경우에는, 이 조정이 통치체 성원들 사이에서 좀 더 유쾌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고, 회의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긴장된 상태를 없애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시 133:1, 야고보 3:17,18) 마찬가지로 이번 조정안 제안이 승인될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직분이 더욱 탁월하게 드높여질 것이며, 그분의 제자들 사이에서 진정한 형제관계의 영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마가 9:50.

    이 말들은 나의 솔직한 마음과 희망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회중에 베푸시는 인도에 도전하는 모습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각주 37) 간단한 설명을 위해 제안서와 함께 첨부하는 소개서에는 리오 그린리스가 쓴 다음과 같을 말이 있었다. “우리의 제안은 지금까지의 체제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성서와 에 실린 기사가 제시하는 방향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성서의 원칙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으며, 분명히 이러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조정 제안은, 1975년 9월 10일에 열린 통치체 회의에서 다루게 되었습니다. 압도적인 다수가 기본적으로 개혁안에 찬성하는 입장이라는 것이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도 또다시 최종적인 조정을 위해서 두 번째 5인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각주 38) 두 번째 위원회는 밀턴 헨첼, 유어트 치티, 라이먼 스윙글, 로이드 배리, 테드 제라스 이렇게 5명으로 구성되었다.] 협회장과 부 협회장은 명확하게 반대 의견을 표명하고 있었으므로, 통치체는 새로운 5인위원회로 섬기는 일에서 이 둘을 제외시켰습니다.

    협회장의 발언은 주로 개혁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부 협회장은 이 제출안이 “협회장 직분에 대한 공격”이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협회장이 스스로 동의하고 제안한 내용을 읽어주자, 그는 노어 형제가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라이먼 스윙글은 자신이 느끼기에 통치체 성원들은 협회장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으며, 그를 “아무것도 못하는 협회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있는 장식용 허수아비”로 생각한 적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사용한 표현은 길르앗 졸업식에서 부 협회장이 연설했던 내용 중에 나온 표현입니다. 그는 강조하기를, 새로 제안한 마련 속에서도 협회장은 여전히 자신의 영향력과, 방식 그리고 자기 주도성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계속되는 회의 중에 부 협회장은 5인위원회가 제출한 문서에 대해서, 결국 자신이 말했던 그대로 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연례 총회에서는 협회의 권한이 계속 유지되는 쪽에 투표할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그때 졸업식에서 했던 연설은 형제들에게 사실을 알려 자신들이 “사기”당했다고 느끼는 일이 없게 하려는 의무감에서 나온 말이었다고 했습니다.

    새로 구성된 5인위원회는 그 제안을 정리해서 1975년 12월 3일에 제출했고, 마침내 최종 투표가 시작되었습니다. [각주 39) 이 새로운 위원회가 이전 위원회의 제안에 대해 유일하게 변경한 내용은, 통치체 위원회에서 사회자를 윤번제로 맡는 것에 더하여 영구적인 ‘조정자’를 두게 하자는 것이었다.] 사회자는 거수를 요구했습니다. 두 명을 제외한 전원은 제안을 실행에 옮기는 것에 찬성했습니다. 손을 들지 않았던 두 사람은 협회장과 부 협회장뿐이었습니다.

    다음날 통치체는 다시 모임을 가졌습니다. 부 협회장은 “그것과 관련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서” 전날 회의에서는 함께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논의를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는 조정안을 지지한다는 뜻이 되는데, “양심적으로 그렇게 할 수는 없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는 네이선 노어를 지칭하면서 반복해서 협회의 “최고 책임자”, “지상에 있는 주의 백성의 최고 책임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대리인들을 사용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니얼 시들릭(슬라브계 후손으로 떡 벌어진 어깨와 굵은 목소리가 특징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어 형제나 프랜즈 형제께서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적인 설명을 해주시거나 적어도 워치타워 출판물에서라도 그 근거를 보여주셨다면 기뻤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들 안하셨네요.” 리오 그린리스는 논평하기를, 모든 회중이 통치체의 감독에 기쁘게 순종하는데 협회만 따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했습니다.

    협회장은 기본적으로 발언을 자제하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표명했습니다. 그의 생각으로는 협회가 통치체와 “나란히” 일하게 될 줄로 알았는데, 조정안대로 하자면 협회가 종속적인 위치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도 했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는 하겠지만요.”

    부 협회장 역시 자신도 두 개의 조직이 나란히 일을 수행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혹시 안티오크와 예루살렘처럼?).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통치체가 지금 하려는 일에 대해서 나는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협회장과 부 협회장은 반대 입장을 유지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로이드 배리가 긴장감 때문인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는데, 이 조정안은 이제 어차피 통과될 것이었기 때문에 기왕이면 만장일치로 채택하자고 두 사람을 설득했습니다. 다시 표결이 진행되었고, 이번에는 노어가 찬성 표시로 손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부 협회장도 손을 들었습니다.

    4년 후 1979년이 되었을 때, 이때는 이미 협회장이 된 프레더릭 프랜즈는 그때의 표결에 대해 말하면서, 그때는 “압박감을 느끼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네이선 노어가 물러나서 양보했을 때, 그 역시 싫지만 따를 수밖에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자신은 그때 개혁안에 찬성한 것이 아니었고, 어떻게 결론이 나올지 “단지 옆에서 지켜본 것”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실제로 일어난 일과 워치타워 출판물에서 이상적으로 그려진 모습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0:17에는 “내가 구리 대신 금을, 철 대신 은을 들여오며, 나무 대신 구리를, 돌 대신 철을 들여올 것이다. 내가 평화를 네 감독자로, 의를 네 작업 임명자로 삼을 것이다.”라는 여호와의 약속이 나옵니다. 「파수대」 1990년 3월 15일호에서는 이 성구를 인용하면서, 마치 조직의 “점진적인 개선”과 “계속되는 연단”이 평화롭고 조화로운 분위기 가운데서 순조롭게 진행된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워치타워 역사 전체에 걸쳐서 통치체가 언제나 존재해온 것처럼 이야기를 꾸며냈습니다.

    하지만 살펴본 것처럼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조직의 역사에서 처음 70년 동안은 통치체에 대해 말하는 사람도 없었고 생각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만 러셀이 자신의 사후에 여러 위원회에서 일을 처리하도록 하고, 권한과 책임을 분산시킬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주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러더퍼드는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그런 제도를 폐지했고, 모든 반대의견을 탄압한 후 20년 동안 협회장 자격으로 전체를 장악하는 독재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노어 협회장 시대에는 이런 분위기가 완화되었지만, 여전히 전체 통제권은 협회장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측근들에 의한 일종의 “내부 반란”으로 협회장의 권력이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1976년에 이르러서야 거의 반세기 동안 한 명이 독점하던 권한이 여러 명에게 이양되었고, 그렇게 해서 다시 위원회가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조직의 역사는 이처럼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적어도 “점진적인 개선”과 “계속되는 연단”이라는 설명과는 일치된 그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워치타워 협회가 1993년에 발행한 역사서 「여호와의 증인―하나님의 왕국 선포자」책 에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기술한 사람들도 있다고 설명하면서, 하지만 그들의 기록이 “언제나 공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말도 나옵니다.

    • “이 책의 편집인들은 객관적이 되어 솔직한 역사를 제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 책 108면부터 109면까지는 1975~1976년에 걸친 대규모 조직 개편에 대해 나오는데, “여호와의 증인의 현대 역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조직상의 조정”이었다는 설명이 들어있습니다.(해당 내용은 본서 **쪽 참조.) 이 책은 과연 그 중요한 사건에 대해 “객관적이 되어 솔직한 역사”를 설명했습니까?

    그 책에는 당시의 개혁이 평화롭고 조화로운 가운데 이루어진 것처럼 기술하고 있습니다. 익명으로 쓴 그 책의 “편집인들”이 앞서 벌어진 수 개월간의 처절한 개혁 투쟁에 대해 전혀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당시 브루클린 본부에 있던 천 명 이상의 남녀 직원들 중 협회장이 여러 번의 아침숭배 모임에서 쏟아낸 분노에 찬 말들을 들었던 사람들이라면, 그 변화가 결코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통치체 성원이라면 누구보다 그 투쟁이 격렬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역사책이 발행되었던 1993년에도 통치체 성원들 모두는 그때의 실상을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인 권력에서 집단 권력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협회장과 부 협회장이 거칠고 격렬하게 반대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역사책에서 “만장 일치로 채택되었다”라고 표현한 그 개혁은 사실 노어 협회장과 프랜즈 부 협회장이 패배가 분명한 상황에 직면하자 마침내 항복했던(부 협회장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압박감” 때문에 마지못해 한) 결과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그 책은 사실 그대로 쓰는 정직함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평화롭고 조화로운 가운데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는 것은 진실 추구라는 도덕적 표준에서 벗어난, 꾸며낸 그림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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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 제시한 도표는 제2차 5인위원회가 작성한 것으로, 1976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새로운 체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1차 5인위원회 성원 중 한 명이었던 존 부스는 일찍이 뉴욕 북부에서 농부로 살았던 사람인데, 부드러운 성격에 생각도 깊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좀처럼 표현할 줄 몰랐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협회에 대해 그가 했던 말은 당시의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해주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그는 제1차 5인위원회의 한 회의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 “협회는 책상위에 놓아둔 펜처럼 단순한 법적 도구에 불과합니다. 내가 펜을 쓰고 싶을 때는 손으로 집어서 쓰면 됩니다. 쓸 것을 다 쓰고 나면 다시 쓰고 싶을 때까지 그냥 내려놓으면 됩니다.”

    펜실베이니아 워치타워 성서책자협회와 그 보조 법인단체들은 바로 이런 위치에 놓인 것입니다. 협회장의 권한은 대폭 줄어서 사실상 없어졌으며, 그의 직위는 단지 법적인 기능만 남게 되었습니다.

    네이선 노어가 사망했을 때, 통치체는 그의 후임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가장 유력한 후보들은 부 협회장 프레더릭 프랜즈와 노어의 감독업무를 가장 가까이에서 수행했던 밀턴 헨첼이었습니다. 이때 헨첼이 프레더릭 프랜즈를 협회장으로 추천했고, 이 의견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습니다. 노어는 출판위원회의 “조정자”(혹은 “조정 위원”)로도 일했었는데 이 자리는 헨첼이 맡는 것이 타당해보였습니다. 하지만 새 협회장 프랜즈는 그 자리에 헨첼 대신 로이드 배리를 추천했습니다. 그 무렵 노어와 헨첼은 수년간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제1차 5인위원회가 노어를 면담했을 때 그는 자신의 협회장 직분을 로이드 배리가 대신 맡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프레더릭 프랜즈는 이것을 과거에 러더퍼드 협회장이 유언처럼 부탁했던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협회장이 갖고 있던 일부 “망토” 즉 일부 직분은 로이드 배리에게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통치체는 결국 조정자 자리에 헨첼을 앉히는 것으로 표결해 결정했습니다.

    「타임」지는 프레더릭 프랜즈가 새로운 협회장으로 선출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을 냈습니다:

    •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적지만, 이번에 선출된 그는 전 세계 2백 20만 명에 달하는 영혼을 관장하면서 교황 이상의 권한을 갖게 된 사람이다.” [각주 40) 「타임」 지 1977년 7월 11일호, 64면.]

    하지만 이 논평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아니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맞았겠지만 이제는 틀린 말이 되었습니다. 협회장이 어느 정도의 명예도 생기고 탁월한 지위를 갖는 것은 맞지만, 그는 더 이상 전 세계적인 통제권을 갖지는 못합니다. 이처럼 통치체 밖에서는 거의 아무도 조직에 얼마나 큰 변화가 생긴 것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협회장은 비록 교황처럼 화려한 장식물은 없었지만, 그전까지는 실제 교황과 맞먹는 정도의 권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전 세계 지부에서도 대주교 못지않은 감독권이 있었으며, 협회장과 지부 감독자들은 각각 자신이 “임명받은 구역 내에서 그리스도교 주임 봉사자”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각주 41) 당시 모든 지부 사무실에서 사용한 지침서 「지부 운영 절차」(Branch Office Procedure) 영문 5, 6면에서 인용. (역자): 이 책은 1958년에 영문으로 발행된 것으로, 「펜실베이니아 워치타워 성서책자협회 지부 운영 절차」(Branch Office Procedure of the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를 줄여서 부르는 명칭이다. 이 책은 회중에는 공급되지 않았고 베델에만 공급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지부에도 개혁이 적용되어, 지부 감독자의 권한은 지부 위원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1976년과 1977년, 두 해 동안에는 기분 좋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선 국제 본부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뀌었는데, 이전보다 더 커진 형제애, 증가된 개방성과 평등지향적인 영이 그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것을 교황 요한 23세가 가톨릭교회에서 “창”을 열어서 “신선한 공기를 들어오게” 했었던 개혁조치와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통치체에 속한 각 위원회들은 브루클린 본부 및 90개 이상의 지부에 있는 베델 가족들의 환경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좀 더 주의를 기울인 사항은 “평 성원들”이라고 불리던 일반 서민출신 증인들의 경제적 필요에 대한 것과, 여성과 노인들에게 특히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1976년에는 특별 모임들이 연달아 열렸는데, 그 모임들은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던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초대한 모임이었습니다. 첫 번째 모임에서는 세계 전역에 있는 지부 대표자들을 초대했고, 두 번째 모임에서는 미국에 있는 여행하는 감독자들을, 마지막 모임에서는 여러 나라와 여러 지역을 대표하는 회중 장로들을 브루클린으로 초대했습니다. 모든 회기에서는 각자 자유롭게 토의하고 발표할 수 있었으며, 참가자들 대부분은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상쾌한 분위기속에서 회기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일반 회중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별로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모임들에서 참석자들이 제안한 많은 것들이 본격적인 실천 단계로 넘어가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전에 비해 많은 것들이 개선되었습니다. 출판물에서는 인간 조직의 권위보다는 성경의 권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직분을 드높이며 강조하는 비중이 많아졌습니다. 이 점에 대해 많은 증인들이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좀 더 온건하고, 균형 잡히고, 동정적으로 접근하는 내용들을 발견하면서 세심한 배려를 받았다고 느낀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활동해온 한 증인은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 속에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통치체 회의에서도 어느 정도 변화된 분위기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널리 전파되었던 1975년에는 기대하던 천년기 희년이 오지 않았고 아무 일 없이 지나가버렸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결과는 겸손하게 자숙하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독단적인 태도 역시 눈에 띄게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통치체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새로운 규칙을 부과할 때도 대단히 조심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특정 행위가 “제명처분에 해당하는 범죄”로 볼 것인지를 결정하는 투표를 할 때도, 비록 부족하긴 했지만 예전보다는 상당히 고민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1976년에 그런 변화를 겪는 동안, 노어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회기에 참석했고, 토의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는 조정안이 가져온 변화를 기뻐하지는 않았지만, 협조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의 발언은 극단적인 견해에 빠지는 것을 극복하도록 여러 번 도움을 주었습니다. 비록 성경적인 논리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다른 성원들이 일반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영향을 주었습니다.

    통치체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에 부 협회장은 시종일관 앉아서 듣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가끔씩 참여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토론이 거의 끝나고 표결을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시간이면 보통 상당한 의견합의가 되어서 결론(이미 개개인들이 밝힌 의견들을 기초로)이 분명해질 때인데, 이때 전체 흐름과는 다르게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표결 결과가 뒤집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 협회장이 마지막 순간에 반대 발언을 한다고 해서 통치체 전체의 의견이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변화된 통치체의 분위기를 이것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사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 협회장은 표결을 위해서 관례상 손을 들어줄 것을 요청받을 때까지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회의록을 보면, 많은 경우에 “찬성 16, 기권 1”로 적혀있는데(아라비아 숫자 대신 다른 기호로 표시하기도 했음), 그 한 명이 바로 부 협회장이었던 것입니다. 보통 이런 표결 결과는, 이른바 “제명처분 문제”와 관련된 정책을 완화시키기로 결정할 때 나타났습니다. 세속적인 문제나 어느 정도 영적인 일과 관련된 결정들(토지 구입, 사무실 운영) 또는 지부성원들을 임명하는 일 등은 대개 만장일치로 결정되었습니다.

    새로운 조정안이 통과되었을 때, 나는 권위 구조에 그토록 중대한 변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협회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들이 자신들은 물론이고 통치체 바깥에 있는 동료들까지 끌어들여서 심한 반대를 했던 것을 돌이켜보면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나의 진지한 희망은 개혁적 조정이 사람들을 더 합리적으로 변화시켜서 서로 수평적이고 평등한 관계가 되는 것, 독단적인 태도가 줄어드는 것, 개개인들에 대해서 그리고 개인적 상황들과 문제들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사람들의 삶을 통제하는 수많은 규칙들을 만들고 적용하는 독재적 방식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런 일들은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습니다. 채 2년이 지나지 않아서 늦가을에 부는 스산한 바람이 겨울 추위가 다가옴을 알려주는 것처럼, 다시 종전 방식으로 되돌리려는 행동의 징후가 반복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